하린 기자
2022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 당선으로 가능성을 확인한 이정은 시인이 첫 시집 『평범한 세계』를 출간했다. ‘평범한 세계’라고 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이정은의 시 세계. 시인에게 시적 발화는 경험 맥락에 멈추지 않고 극단적 상상력을 통해 확장되고 확산된다. 따라서 이 시집의 모티프들은 감성적 로맨스보다는 파토스적 파란(波瀾)에 가깝다. <미디어 시in>에서는 인터뷰를 통해 첫 시집 『평범한 세계』에 담긴 의미를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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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평범한 세계』 상재를 축하드립니다. 첫 시집은 남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들 합니다. 발간 소감을 말씀해주세요.
답변: 무척 떨립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향인데요. 용기 내어 동굴 밖으로 나온 심정입니다. 눈부셔도 눈 감지 않으려 합니다. 시(詩)가 도와주길 바래봅니다.
2. 시집 표제가 ‘평범한 세계’인데요. 묘한 뉘앙스를 풍깁니다. ‘평범해서 슬픈 세계’,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세계’ 등의 의미로 읽히는데요. 어떤 의도로 표제를 지으신 건가요?
답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제목에 대한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평범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세계가 펼쳐지고 있지요? 그 안에는 물론 평범해서 발생 되는 슬픈 세계도 포함될 것입니다. 시집을 읽고 독자께서 나의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일까? 자문해본다면 그 의미가 더 커지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오독을 자유롭게 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쩌면 평범한 세계가 나를 범한 것은 아닐까 의문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평범한 세계’라는 화두를 곱씹어보시면 어떨까싶습니다.
3. 해설을 쓴 오민석 평론가는 ‘아브젝시옹의 시학’이란 주제로 이정은 시집을 바라보았는데요. 아브젝시옹란 단어는 비열, 타락, 비참 등의 뜻을 갖으며, 항상 덮어두고 억눌러왔던 것, 즉 죄, 오물, 혐오, 도덕적 타락, 정신적 피폐, 질병에 걸린 육체, 근친상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모티브 중에서 어떤 모티브를 실제로 시 작품에 담으려고 했나요?
답변: 저의 주된 모티브는 아버지입니다. 1차적으로는 육신의 아버지에서 권력과 국가의 아버지, 그리고 철학적 종교적 의미의 아버지까지 포괄됩니다. 강력한 아버지의 ‘힘’에서 가장 연약한 딸의 관계를 근친상간의 극단적인 형태의 모습으로 담기도 했지요. 이 근친상간이 실제 모티브이긴 하지만 그것만의 궁극적인 모티브는 아닙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무의식의 흐름, 분열된 자아 그리고 국가 폭력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아버지, 왜요」 작품에서 보인 바와 같이 국가 시스템의 아버지 모습까지 모티브가 되는 것이지요. 표면적으로 보인 근친상간의 모습만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피폐에 이르러 파괴되어가는 정신 분열, 인간성 문제까지 심층적 모티브들이 존재합니다. 그 뿌리는 물론 아버지의 ‘힘’과 방식에 집중되는 것이지요.
4. 제주도에 거주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제주도 생활은 어떠신가요? 시를 쓰는데 제주도라는 특수한 공간이 어떠한 힘이나 분위기로 작용을 하진 않나요?
답변: 분명히 작용합니다. 저는 시를 쓸 때 ‘곡비’라는 생각을 합니다. 내 안에 울음도 시가 대신 울어주지만 타인의 슬픔도 껴안고 울어주는 ‘곡비’가 되고 싶습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섬이지만 슬픔이 서리지 않은 곳이 없는 통곡의 섬입니다. 제가 곡비가 되어서 제 울음과 함께 제주도의 울음도 시적인 형상화로 그리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견해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제겐 개인적으로 제주도는 치유와 회복의 공간입니다. 어쩌면 제 안의 트라우마가 훈훈하게 녹아서 흐드러진 들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저는 제주도에서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죠.
5. 파토스적인 상상력이 눈에 뜨이는데요. 평소에 시를 쓸 때 상상력에 많이 의존을 하나요? 아니면 현실 세계를 많이 반영하나요?
답변: 상상이라는 것도 현실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실 체험이 극대화되었을 때 상상력 역시 무궁무진하게 발휘되는 거겠지요. 파토스적인 상상력도 현실 반영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이것이 시를 쓰는 원동력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어떤 시는 쓰고 나면 며칠 몸살처럼 ‘시 앓이’를 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추체험도 체험이 아닐까 해요. 시라는 장르는 묘하게도 1차원적인 문제로 설명될 수 없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6. 내용적인 측면 말고 형식적(또는 구성적) 측면에서 시를 쓸 때 고민하는 부분은 없나요?
답변: 있습니다. 시집에 수록된 「밖은 장마입니다」 시는 도서관 안의 세계와 장마 중인 도서관 밖의 세계를 연동하여 구조적인 면을 고려해서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도서관 안의 모습을 그렸지만 「밖은 장마입니다」로 정하게 된 것이지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구현하기 위해 구조적인 측면도 함께 고민해보기도 합니다. 「가젤처럼 뛰었다」 시 역시 형식적인 면을 실험해 본 것입니다. 또한 이번에 시집에 넣지는 않았지만 아파트 형태의 도형을 빌어 시의 본문과 구조적 콜라보를 시도한 작품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형식과 구조에 대한 실험을 앞으로도 이어가 보려고 합니다.
7. 첫 시집을 내고 나서 책과 관련된 활동 계획은 없나요? 그리고 앞으로 두 번째 시집을 향해 갈 텐데요. 두 번째 시집의 방향성은 정해진 게 있나요? 있다면 귀뜸해주세요.
답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시를 쓸 때는 어떤 목적성을 가지고 쓰지 않았습니다.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주워 담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두 자연스러운 발화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평범한 세계』 마지막에 수록된 시가 「얘야, 양을 세야지」인데요. 잔혹동화 같은 동화책만 읽던 화자가 ‘아버지 한 마리’라고 대상을 지칭하면서 양(즉 아버지)을 죽이는 장면을 묘사했는데요. 이것은 상당히 저의 자의식이 반영된 시 쓰기였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면서 끝맺는 결말을 통해 아버지 문제를 어떻게 더 풀어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을 후속편에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또 다른 상징성을 띤 아버지의 모습이 두 번째 시집에서 어떻게 분출되어 나올지 모릅니다. 저도 제 시가 어떤 양상을 띠게 될 지 무척 궁금합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너는 바람이 아니라
이정은
깊도록 걸어도
발등으로 번지는 물결무늬
바람 소리에 쓰러져 누워
그물망에 스스로 묶이는
너는 바다가 아니라
너는 바람이 아니라
흰머리 풀어헤친 흐느낌
아기 발바닥 사이로 스며드는 소금 울음
가늘게 떠도는 습자지처럼
은박 입힌 오랏줄
걸어 나올 수 없는
푸른 얼룩
― 『평범한 세계』, 시인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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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세계
이정은
약재 냄새가 허공을 떠도는 날은
뒤꿈치를 붕대로 감고 싶었다
저편과 이편은 상처의 고리일까?
다친 문이 열렸다
양복 입은 마네킹이 걸어 나온다
방 속에 맺힌 둥근 침대는
문지방에 걸터앉아 웃는다
암컷을 낳았다
촛불이 켜져 있지 않은 케이크처럼
― 『평범한 세계』, 시인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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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야, 양을 세야지
이정은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내기 할래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거니까
왜 피 맛을 자꾸 보는 거야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동화책 속에 양은 보이지 않고
헉헉거리는
방울소리 다 지나가면 잔혹동화는 끝이 날까
양을 죽였어요, 아버지를 위해서
감탄사는 하나예요
죽어가는 양을 세야지
아버지 한 마리
― 『평범한 세계』, 시인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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