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타이타늄』(시와정신, 2023)은 변선우의 첫 작품집이다.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적 역량에 대한 신뢰감”과 “소재를 집요하게 응시하는 힘과 다층적 사유를 전개하는 역량”(김혜순, 조강석)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얻고 등단한 그가 야심 차게 세상 밖으로 내놓은 책이다.
변선우는 최근 대전문화재단 차세대 artiStar로 선정되어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가)고 있기에, 『타이타늄』은 그가 수행하고 있는 창작의 역동적 여정에 있어 지표와 표석을 삼을 수 있는 성과물에 해당한다.
대전과 제주를 오가며 곱씹은 생태, 지역, 소수자 문제에 관한 의미심장한 애정과 연대가 녹아 있는 『타이타늄』에는 자연과 연대를 수행하고, 침잠하여 있는 자아를 부상시키고, 소외된 목소리를 조명하고 부각하는 등 시적 주체의 개성 있는 언술을 통해 새로운 시적 가능성이 모색되며 창안되고 있다. 『타이타늄』에 구사되는 농도 짙은 동시대의 고민은 초현실주의적 문법과 결합함으로써 이색적이고 아이러니한 감동을 자아내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른 작품집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타이타늄』은 총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 2, 3부에는 시가, 4, 5부에는 산문이, 시와 산문 사이사이에 사진이 게시되어 있어 특이한 짜임새를 하고 있다. 산문은 시적인 맛을 물씬 풍겨 장시의 느낌을 자아내고, 사진 또한 시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시산문집 『타이타늄』은 흡사 시집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타이타늄』은 장르적 성격상 시와 산문이 한 데 묶인 시산문집이자, 시와 시적인 것을 통해 다채롭게 구성되면서 균질하고 간단없는 시적, 미적 인식을 관철하는 하이브리드형 시집이다.
궁극적으로 장르와 생사와 시공을 초월하여 연대하기를 고대하는 『타이타늄』은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희망과 존재론적 연대의 계시를 준다. 시대 · 현실의 문제를 예각적으로 드러내면서, 변선우의 ‘지금-여기’와 앞으로 노정할 시 세계가 집약되어 있는 『타이타늄』에 주목해보자.
< 책 속 시 맛보기>
조직
변선우
농원에 옹기종기 놓여 있는
모종들은 모종 간 모종의 합의를 하였다.
첫 번째 합의는 어디를 가더라도 뿌리내리지 않기. 두 번째 합의는 뿌리를 내리더라도 열매 맺지 않기. 세 번째 합의는 열매를 맺더라도 맛있지 않기.
모종들은 줄기와 이파이를 열렬히 흔들어댔고, 합의는 영혼 깊이 새겨졌다.
걔 중, 한 유약한 모종은 밤중에 꿈을 꾸었다. 꾸면서, 몸도 떨었다. (프로이트에게 꿈은 강력한 경종이므로, 의미가 작지 않으리라.)
첫 번째 꿈은 시래기 된장국이 쫓아오는 꿈. 두 번째 꿈은 새싹보리 부침개가 쫓아오는 꿈. 세 번째 꿈은 홍어무침이 쫓아오는 꿈.
네 번째 꿈은 시래기 된장국과 새싹보리 부침개와 홍어무침이 한 사발에 섞여, 유약한 모종의 거름 되는 꿈.
꿈은 전파되고 전염되어 모든 모종에게 전달되었으므로, 모종의 합의는 힘을 잃고야 말았다. 영혼에서 탈락한 합의는 정처 없이 부유하였다.
그러나 모종들의 모종 간 모종의 합의는 언제든 다시 전개할 잠재력을 분실하지는 않았다. (모종들의 조직력은 힘이 세다.*)
모종들은 몸을 털었다. 해가 쏟아졌다.
*이혜원 선생님의 평론 「상상력은 힘이 세다」 제목을 변주. (선생님께서 평론의 마지막에서 “상상력은 힘이 세다. 상상력의 고삐를 틀어쥔 시인들은 더욱 힘이 세다.”고 하셨는데, 이 역시 변주하자면 “조직력은 힘이 세다. 조직력의 고삐를 쥐고 있는 모종들은 더욱 힘이 세다.”고 할 수 있겠다.
— 『타이타늄』, 시와정신, 2023.
-----------
마음과 동그라미
변선우
차가운 나무 아래
사이좋게 개켜진
감자들…
나는 감자들이 무서워 그 근처로
발도 들이밀지 못하였지만
으깨진 깡통을 던져본 적은 있지
음정이 약간씩 비틀어지긴 하였지만
등 돌리고 노래를 불러준 적 있지…
삶은 감자를 씹다가 눈알이 뒤집힌 아버지 위해
뺨을 날리던… 냄새나는 과거는
누가 보상해줄까, 저렇게
시퍼렇게 눈 뜬 감자들을 향해…
다 받아주는 차가운 나무를 향해
떠들 수 있을까 마이크를 쥐어주면
수행문을 읽어보려 하였는데
차가운 나무는 더 차가워지고
유모차가 지나가고 개가 지나가고
새장 문이 열리자 기어들어가려는
온 세계의 아버지들이 줄을 서고…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손에 쥐여놓은
이 감자를… 감자는 모퉁이를 잃은 대가리이며
짖어대는 성질머리가 있지
펑 터질 수도 있는 감자, 난센스
새가 털을 흩뿌리며 날아가고 있네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았던 그 날처럼
물이 정수리까지 차오른다면
내가 개처럼 헐떡일 수 있다면
그네는 흔들거리고 대문이 열릴 것이다
— 『타이타늄』, 시와정신, 2023.
------------
타이타늄
변선우
*
신은 트럼프card로 빌딩을 지었다. 꼭대기에 옥탑을 만들었고, 2층에는 롯데리아가 입점했다.
롯데리아는 등산처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던 중, 한 소년이 트럼프의 틈새로 떨어진 사고가 있었다. 다만 유실해버린 중심이었고 낙하지점에서 물풀이 자라났다. 아무도 비를 내리지 않아서 물풀이 더 건강해졌다는 이야기. 모든 틈새는 금세 메워져서, 기억이 달아난 사람들이 세고 셌다.
*
당신과 내가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서로의 손에 서로의 손을 넣고, 다른 손에 조각 케이크를 들고. 연한 부위는 어디로 갔나, 묻지 않고. 이곳이 도마동 최대 쇼핑센터라는 선전과 더불어, 사람들이 정신처럼 들락날락한다. 2층에는 맥도날드도 생겼고, 유니클로도 생겼다. 다른 층에도 각양각색의 매장이 들어섰다. 양손 무거운 건 우리 뿐 아니구나, 의심하지 않고.
우리는 내일 오후, 7층 하이마트에 구경 가기로 약속한다. 세탁기를 작동시켜 보기로 한다.
목표가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여진처럼 종횡하고 있다.
*
우리는 옥탑 문턱에 앉아, 도마동에서 가장 먼저 비를 영접한다. 허공이 아닌 지상이 되자고 약속한다. 그러고는 다짐을 긁어모아 성냥처럼 만들어 쌓기 시작한다. 어두운 빛을 내며 높아지는데, 누군가 이 건축물을 오르기 시작하자 우리는 말을 줄인다. 얼굴이 하얘져서 들어가는 여중생 둘이 있다. 여전히 새파란 입술의 소년도 있다. 소년의 손에는 은방울꽃다발이 들려있고, 판 초콜릿 조각도 쥐어 있다.
*
우리는 닭고기를 뭉근하게 졸여 닭엿을 만들어 먹는다. 조각 케이크를 하나씩 차지해 먹는다. 박수를 치다가, 숟가락으로 가능한 일들을 생각하다가, 새싹보리를 손으로 비벼 갈아 먹는다. 발바닥이 덩달아 뜨거워져 시소를 생각한다.
*
눈알로 뒤덮인 바위가 나오는 꿈. 아무리 달려도 내가 나를 납득할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의 망토를 놓쳤다.
나는 새벽처럼 깨어나 냉동만두를 입김 불어 녹인다. 견고해질 수도, 부수어질 수도, 더 이상 깨어날 수도 없다
— 『타이타늄』, 시와정신, 2023.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변선우 시인, 첫 시산문집 『타이타늄』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천서봉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시인선으로 발간 (0) | 2023.09.17 |
---|---|
200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양수덕 시인, 시집 『자전거 바퀴』 상상인시선으로 발간 (0) | 2023.09.17 |
본지 기자 리호 시인 개성 넘치는 디카시집 『도나 노비스 파쳄』 발간 (1) | 2023.08.24 |
본지 기자 이정은 시인, 첫 시집 『평범한 세계』 시인동네 시인선으로 발간 (0) | 2023.08.23 |
김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활력』, 시인의일요일에서 발간 (0) | 2023.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