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천서봉 시인의 두번째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가 문학동네시인선으로 발간됐다. 2005년 『작가세계』를 통해 데뷔한 천서봉 시인은 첫 시집 『서봉氏의 가방』에서 ‘가방’이 ‘당신’의 부재로 인한 상실과 그리움에 지친 시적 화자가 “영혼”을 “재설계”(「납골당 신축 감리일지」)하기 위해 “갈비뼈 같은 도면”(「이상 기후」)을 넣고 다니는 상징물로 작용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징물들을 통해 시인은 화려하지 않으나 밀도 있고 정석에 가까운 말의 본디를 구사하는 차분한 시들을 선보였다.
그로부터 십이 년, 그간 치열하게 연마한 시어로 써 내려간 시 예순다섯 편을 엮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닫히지 않는 골목’ 연작시를 펼쳐 보인다. 골목은 “닫을 수도 열 수도 없는” “개방된 공간”(문학평론가 이철주, 해설)으로, “없는 것들이 없어서 있지 말아야 할 것들로 가득”한, “시와 삶을 구분할 수 없는”(「닫히지 않는 골목」) 장소이다. 시적 화자의 소유품인 ‘가방’에서 ‘골목’이라는 열린 공간으로 확장된 이러한 시선과 함께, 건축설계사로도 일하고 있는 시인만의 건축적인 상상력 또한 흥미롭게 표현된다.
유년의 기억을 길어올려 그려낸 골목에는 “재미있는 우울”을 구하러 다니는 소녀가 있고(「닫히지 않는 골목—우울 상점」), 죽은 삼촌과 이복동생이 살며(「닫히지 않는 골목—性 가족공장」), 어린 남자를 집에 들이면서 동네에 소문을 만들어내는 여자가 존재하고(「닫히지 않는 골목—붉은 집」), “고장나도 좋을 불행의 춤을” 추는 아이들이 노닌다(「닫히지 않는 골목—어린이집에서 춤을」). 그래서 ‘골목’은 이 시집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코드가 된다.
골목과 더불어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발목 잃은 자’는 “이별”(「아가미」) 후에 다가온 상실의 정서를 담은 이미지이면서, “시라는 공동체가 함께 앓고 기억하고 긍정해야 하는 타자의 존재 형식”(해설)으로 발현된다. 이를테면 이는 “허기를 배우고 재난을 익”(「매일매일 매미—돌아오지 않을 아이들에게」)힌 아이들이다. 유년의 기억 속 골목가의 사람들에서 또다른 바깥 풍경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이는 존재. 이렇게 시인은 과거의 기억에만 정주하지 않고 시인의 눈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바라본다. 그럼으로써 슬픔과 회한, 연민에 잠식되지 않고 ‘시(詩)란 무엇인가, 또한 시를 쓰는 자의 태도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치열하게 사유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첫 시집이 주로 ‘당신’으로 표상되는 애인, 아버지, 어머니 등과 또 다른 자아인 화자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과 슬픔의 정서를 그렸다면, 두번째 시집에선 이미 죽었거나 사라진 존재로 표상되는 ‘발목 잃은 자’들이 골목가 어느 한편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는 ‘사이’의 징후를 매력적으로 형상화한다.
천서봉의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을 통해 우리는 오랜만에 ‘사이의 미학’을 발견하게 되는 즐거움을 흠뻑 누리게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발목이 없는 사람
천서봉
영혼에 관해 말할 때, 우린 자주 발목을 잃어버리곤 했습니다
발목이 사라져간 자명한 어제를 이제 상징이라 부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물이 끓는데, 돌고 도는 목성의 얼음띠 같은 영혼들
낯선 곳에서 잠을 깨는 일은 소멸에 가까워서 아름다웠습니다
문턱을 넘지 못하는 생각은 무너지고 나서도 다시 무너지겠죠
깊어지는 모든 것은 철학이 될 테고 자정은 비밀과 닮아갑니다
골목이 소매와 닮았습니다 점점 더 소문에 가까워지는 우리들
알아보겠습니까, 이제 물은 끓어오르다 못해 넘치고 있습니다
당신을 설득할 생각이 없는 나는 당신 병이나 함께 앓았으면 했습니다
―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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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들
천서봉
그해 겨울엔 속죄하듯 폭설 내렸고 별처럼 나는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밤거리, 고깔모자의 가로등을 쓰고 걷다가 어느새 내가 어두워졌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평생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때마다 한 겹의 옷을 더 껴입었던 셈입니다
하루는 따뜻한 걱정들을 불러다 거한 저녁을 먹이느라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습니다
길을 잃은 문자들을 수소문하다가 내 마음에도 골목의 무늬 같은 더딘 손금이 여럿 생겼습니다
웃을 때도 울 때도 항상 곁에 살던 수많은 엄마들, 엄마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랑그인 적 없었습니다
망상과 식욕 사이 봄비가 붐빕니다 참 많은 당신인 것을 알겠습니다 아픔이 몰라볼 만큼 나는 살찌겠습니다
몸이 되기를 거부하는 거대한 결핍으로, 당신이 의식하지 않는 소소한 배경으로 천천히, 나를 소멸해 가겠습니다
―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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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당신
천서봉
저녁이 어두워서 분홍과 연두를 착오하고
외롭다는 걸 괴롭다고 잘 못 적었습니다 그깟
시 몇 편 읽느라 약이 는다고 고백 뒤에도
여전히 알알의 고백이 남는다고 어두워서 당신은
스위치를 더듬듯 다시 아픈 위를 쓰다듬고,
당신을 가졌다고도 잃었다고도 말 못하겠는 건
지는 꽃들의 미필이라고 색색의 어지럼들이
저녁 속으로 문병 다녀갑니다 한 발 다가서면
또 한 발 도망간다던 당신 걱정처럼 참 새카맣게
저녁은 어두워지고 뒤를 따라 어두워진 우리가
나와 당신을 조금씩 착오할 때 세상에는
바꾸고 싶지 않은 슬픔도 있다고 일기에 적었습니다
―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2023.
천서봉 시집 『수요일은 어리고 금요일은 너무 늙어』 문학동네 시인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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