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
2021년 ≪현대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여세실 시인이 첫 번째 시집 『휴일에 하는 용서』(창비, 2023)를 세상에 내놓았다. 문학평론가 홍성희는 여세실 시인만의 언어가 신화적 미덕을 수행하게 되었다고 평가하면서 언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믿음의 흔적을 들여다보며, 독자는 시인만의 상상적 언어와 이미지를 믿는 방식으로 그의 시 세계에 빠져들 것이라고 말한다.
여세실은 시집을 여는 시 「온통」(p10)에서 자신의 언어를 창조하고 재편할 것을 선언한다. ‘아름답다는 말이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해 주기를 바라는 아이가 되어서 ‘글자 스티커가 붙은 실로폰’을 치며, 그때마다 해체되는 언어들을 다시 조립할 것을 암시한다. 사람들이 돌아서고 ‘더 이상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그의 작업은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다짐한다.
시집 속 시에는 여러 종류의 책이 나온다. 친구라는 단어를 찾기 위해 뒤지는 사전과, 쓰름매미 사진이 실려 있는 곤충도감, 이름을 바꾸려고 뒤지는 명리학 책, 그리고 아이와 함께 펼쳐보는 식물도감 등이 등장한다. 그의 시 세계에 나오는 책은 그저 사물이거나 필요한 정보를 찾는 참고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읽는 사람에게 이미지와 언어를 심어주는 일종의 시인만의 학습 체계인 셈이다.(홍성희 평)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란 기표와 기의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기표는 단어나 소리와 같은 기호의 물리적 형태를 말하며 기의는 기호와 관련된 개념이나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기호학 체계에서 소쉬르가 언급했던 랑그와 파롤 중 파롤을 가장 충실히 창조해내는 이가 바로 시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세실 또한 언어의 기본 구조인 랑그가 아닌 개별적 언어 행위인 파롤을 자신만의 매력으로 표현해낸 시인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만의 표현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그의 시를 전반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은 함께 살고 있는 사람과의 일상과 사랑에 대한 감정이다. 그의 시에는 ‘꼬리에 노란 깃을 단 펭귄을 좋아하는’ 너와 ‘빙판 끝에서 주저하는 펭귄을 찍자고’ 하는 내가 등장한다. ‘적당한 펭귄과 끝 간 데 없는 펭귄’. 너무 다른 두 사람이지만 시적 화자는 어떻게든 상대방을 닮아보려고 노력한다. 애잔하고 씁쓸한 감정이 한껏 배어있는 시이다.(작당, p43) ‘네가 퉤 뱉어놓은 양칫물의 둥근 테두리 속에서’ ‘얼굴 한 컵을 들이켜고 우리는 마주 보고 앉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럭무럭 자라나는 저 식물을’(생활, p34) 두려워한다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끊임없이 일상과 관계를 두드린다. 이전에 없던 실패와 계속되어왔던 물음을 이어간다. 살아본 적 없는 ‘나’와 되어본 적은 없는 타자 사이에서 ‘나’는 ‘나’를 지지하고 타자는 타자에게 동의하며 헤맬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실패에도 세부가 있어서 실패를 저미고 불을 지핀다. 그러모아 나아가고 망설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슬픔 밖의 끝장을 가뿐하게 여기는 시인. 시인을 응원하고 시인의 시를 사랑하고 싶은 이유이다. (빗댈 수 없는 마음 p120 인용.)
<시집 속 시 맛보기>
물색
여세실
나는 오후 네시에 깨진 유리컵 사이에 걸쳐 있다
혼자 울고 혼자 그치는
커튼은 타오른다
이끼가 파랗게 눕고
비 냄새가 난다
햇볕은 나를 가로막고, 끌어안으며 밀어낸다
바깥을 거둬들인다
더 깊어지는 안쪽을 들여다본다
나라고 믿고 싶은 것과
그 속삭임을 깨부수고 싶을 때
컵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노래를 부르면서
나를 젖게 하는 말은 이미 내 속에 있다고
이제는 헤아리지 않으려고 해
밖은 풀어진다 안은 입술을 달싹인다
주름을 늘인다
커튼은 가슴을 쳐 가슴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가슴을 쳐
들이켜고도 남아 있는 혼잣말을 바라보면서
아무도 쳐다봐주지 않는 풍경과
누구의 얘기도 될 수 있는 중얼거림이
부딪치고 껴안고
음악을 끄집어낸다, 더 작은 흥얼거림
커튼은 흩날림을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고
떠다니는 먼지는 본다
너도 내가 싫으니
맨손체조를 하듯이
무릎을 바짝 펼 때 무릎이 거기 있다는 것
거짓말이, 복숭아뼈가, 팔꿈치가
무사하다는 것
커튼은 어디에 매달려도 커튼
매달리지 않아도
바람이 위로해도 커튼, 찢어진 커튼
누군가는 눈동자 모양의 유리창을 상상하고
깨부수고
그 위로 걸어가고
걷잡을 수 없이 불어간다
커튼은 늘 날리는 자세, 털어버리는 모양
안팎을 내맡긴다
― 『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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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각
여세실
부둣가 식당 한구석에 패각이 쌓여 있다 너는 패각 하나를 줍는다 패각 안쪽에 무지개 띠가 넓게 펴져 있다 습한 바람이 불어온다 패각의 겉면은 단단하다 패각을 가진 것들의 속살은 말랑말랑하고 미끄럽다 어둠이 거느린 패각에는 수평선이 새겨져 있다 짠내가 끼쳐온다 글피에는 태풍이 온다고 했다 고삐가 풀린 거지, 바다가 사람을 부르는 거지, 무사태평 속에서 고르고 고른 이야기는 울퉁불퉁하다 파도 소리가 일정하게 반복된다 바다가 깍아놓은 뼈대는 무르고 성기다 너는 내게 마지막으로 운 것이 언제냐고 묻는다 가로수 그늘과 나뭇잎이 충돌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속으로 열을 세고 너는 마지못해 내 등을 두드린다 식당에서 나오던 사람들은 얼마 전 앞바다에서 고래떼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를 지나쳐 간다 슬기로운 사람은 고래떼가 쏘아올린 음파를 해석하려 하지 않아, 지붕 낮은 민박들 사이로 고양이들이 지나간다 무늬가 같은 무리였다 그중 한 마리는 웅덩이에 고인 물을 핥다가 이쪽을 한번 쳐다보고 돌담을 넘어 사라진다 이렇게 바다가 잔잔한데 비가 온대, 콘크리트 블록들 사이에 구겨진 전단지가 버려져 있다 수면 위에서 물결이 밀려올 때마다 앞뒤로 흔들린다 너그러운 사람은 주인공의 잠꼬대를 받아 적는 인물의 미래를 헤아리지, 그가 사실은 악당의 하수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안위를 걱정하지, 빈 화분과 초록색 그물망 사이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간다 너는 갈고리에 꿰여 올라온 새끼 돔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그 새끼 돔은 풀어주어도 잘 살지 못한다고, 숙제를 하지 못해 학교에 가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한다 저 별이 거짓이라도 좋다 이 섬은 상공에서 보면 사람의 귀를 닮아 있대, 구름이 서서히 흩어진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을 구하지 못한 시기가 있을 테니까, 패각 속에서, 밑창을 드러낸 운동화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사람, 혓바닥에 설태가 낀다 옷깃을 여민다 가로등이 켜진다 미워하는 마음에도 리듬이 있어 너는 옷깃으로 패각을 닦는다 이 믿음이 가짜여도 좋다
― 『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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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 하는 용서
여세실
밀랍으로 지어진
얼굴 속에서 하품을 하고 일어나
양봉을 했다
기지개를 한번 켜고
뒤집어진 고무장갑 속에서
꿀을 떴다
새벽에 큰비가 내려
개들이 짖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흘러내려
서서히 굳어갈 때에도
이 다짐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부지런히 나를 나르고
키워냈으므로
내가 나를 때리는 날 속에서
터진 입에 꿀을 바르는 날 속에서
채밀을 했다
꿀이 찼다
달았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꿀을 빨던 벌들의 날개가 젖어가고
날갯짓이 뜨거워서
꿀벌들이
꿀통에 빠져 죽었다
밀랍이 통째로 흘러내렸다
벌집을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는
얼굴 몇숟갈 떠먹었다
죽어서도
떼로 몰려와
날개는
온종일 내 머리통 속에서
산란을 하고
햇빛을
갈기갈기
할퀴어놓았다
나더러
살으라고
등짝을 쳐댔다
― 『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 2023.
여세실 시인의 첫 시집 『휴일에 하는 용서』, 창비시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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