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휼 기자
『시에』로 등단하여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하호인 시인이 등단한 지 5년 만에 첫 시집 『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상상인, 2023)을 펴냈다.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들어선 시인은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가면서 매일시니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시는 시인의 그림자이자 시인의 본체이기도 하다. 어떤 대상을 오래 바라보며 관조하는 그것은 어느 사이 시가 되고 시는 또 삶이 된다. 자신의 시처럼 살아가고 있는 하호인 시인은 여린 풀꽃 한 송이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그러기에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구순의 어머니를 모시고 풀꽃처럼 살아왔다.
오래 걸었습니다.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주름지고 낡아가는 것들
그대로 따듯하게 다독여주고 싶습니다
여린 풀꽃 한 송이도
그 자리에 있는 이유가 있듯
누군가에게
그런 언어로 다가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시인은 항아리 속에서 홀로 숙성되어 가는 겨울 동치미처럼 시 속에서 자신을 숙성시킨다. 상추씨를 털며, 호박고지를 만들며, 소금 항아리를 닦으며, 저마다의 자리에 조용히 존재하는 것들의 이름을 따뜻하게 호명해 준다. 시가 오는 지점에 서서 귀를 열고 내면에 흐르는 감정을 조망하며 자신만의 풍미를 지닌 메뉴로 정갈한 언어의 밥상을 지어 올리는 시인. 이러한 시인을 향해 해설을 쓴 이성혁 문학 평론가와 추천사를 쓴 조선의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홀로 익어가는 삶이란 현재에 구멍을 뚫으면서 나비가 되어 날아갈 기억을 품고 사는 삶이다 하호인 시인은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시집에는 시간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성과 의식을 드러내는 시가 많다. 그 시는 현재에 구멍을 내는 기억의 흔적에 시적 시선을 던지면서 이루어진다. 하호인 시인은 자연으로부터 시를 발견하고 그 시로부터 시의 본질을 배우고자 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우리는, 시인이 우리가 무심히 지나칠 자연물들 또는 자연 현상들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이로부터 시적인 깨달음을 얻고 있는 시편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이성혁 문학 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하호인 시인은 대상에 접근하는 방법이 남다르고 눈부신 집중이 시를 살리고 있다. 존재를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도 조근조근 할 말을 다 한다. 시간의 영원성을 위해 회상과 기억을 시의 도구로 사용하여 현제와 일치 시킨다. 내면의 적충된 삶의 파편을 조합하여 시간의 제자리를 꿈꾸는 시인, 하호인 시인은 번잡한 세속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조용하게 몸부림친다. 말을 세우는 정신이 올곧다. 형상화 과정이 자상하고 우아하다. 시의 완성도를 위해 느낌과 감성을 전략화 하지만 시에 갇히지 않으려고 모호함과 고리타분함을 배척한다. 감각의 착란을 거부하는 하호인 시인의 성정이 차분하다. 마음에 어룽거리는 시가 아름다운 까닭은 빈틈없고 충만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표4, 조선의 시인)
1부 ‘나의 변방 모과나무’ 2부 ‘말하지 않아도 들리는 것들’ 3부 ‘손끝에서 천천히 살아나는 시간’ 4부 ‘머위 순 같은 언어 하나 자라났다’로 구성된 『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 』은 자연과 일상으로부터 시적 깨달음을 얻게 된 순간순간을 담아내고 있다. 주름지고 낡아가는 것들을 따듯하게 다독여주고 싶다는 시인의 말처럼 따뜻한 시선과 위로를 주는 시인의 본성이 슬픔마저도 둥글어지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시집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둥근 슬픔
하호인
누에 채반에서 소낙비 내리는 소리가 그치면
금줄 친 고요가 머물렀다
터질 듯 탱탱하고 부드러운 몸
고개를 꼿꼿이 세워 좌우로 흔들며 섶을 찾는다
입으로 뽑아낸 부드럽고 질긴 명주실 가닥으로
망설임 없이 자신을 그 속에 가둔다
달빛이 차오를수록 고치는 두터워지고
제 몸의 진액으로 지어진 모서리 없는 집이 완성됐다
그것은 한 번의 찢김으로
미련 없이 버려질 정결한 산실
올올이 풀어내면 이천 배가 넘는다는,
끊어질 듯 이어온 실낱같은 나날이 아득하다
온갖 고생을 다 해 지어진 골방에
주름만 가득한 번데기로 남은 당신은
어느 날 훌훌 털어 하늘로 올릴 정결한 화목제
섶에 매달린 누에고치마다
그렁그렁한 슬픔이 둥글다
— 『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 상상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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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빛을 터트리는 아침
하호인
냉이꽃 하얀 풀밭에 주둥이 깨진
소주병 하나 뒹굴고 있다
상처가 쌓이면 어둠이 되는 것일까
누군가 감당하지 못한 하루를
깨어져 입술 없는 병 귀퉁이에
칠흑 같은 파열음으로 버려두고 갔다
희고 연한 귀를 가진 것들
어젯밤에는 잔뜩 웅크리며 잠들었겠다
여기저기 흩어진 어둠이
깨진 병 끄트머리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데
유리 조각 사이로
냉이꽃 흰빛을 톡톡 터트리고 있다
— 『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 상상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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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은 달
-동짓달
하호인
쏟아지는 눈을 보며
새알심을 빚어요
쌀가루를 뿌려가며 단단하고 말랑하게
치댈수록 부드러워지는 반죽
뜨거운 물로 익반죽해야 찰져지는 것처럼
살면서 만난 아찔한 순간들이
하회탈처럼 굵고 따뜻한 주름을 만들었을까요
잘 빚은 말랑한 열두 줄
똑똑 썰어 동글동글 빚어내니 한 양푼 가득해요
끓어오르는 붉은 팥물 속에서
하얗게 떠오르는 둥근달
가만가만 헤아려보니 삼백육십오 일에서
아직 아홉 날이 부족하네요
아, 마지막 아홉은
정말 곱게 빚어야겠어요
그중 하루쯤은 나를 위하여
푹푹 빠지게 쌓인 눈 속을 건너
한 그릇 나누고 싶은
뜨거운 동지죽을 그릇그릇 떠내는 밤
— 『이 비 그치고 햇살 돋으면』, 상상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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