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후 시집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 『불란서 고아의 지도』,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을 출간하고,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박정대 시인이 열한 번째 신작 시집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을 펴냈다.
박정대 시인에겐 여전히 풀리지 않은 질문이 따라다닌다. “박정대의 시의 근원은 어디인가?” “박정대의 시의 방향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펴낸 열 권의 시집들을 읽어낸 몇몇의 평론가와 시인들의 입을 통해 약간의 실마리는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그의 방랑과 고독은 하나이다. 아름다움은 고독한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발굴된다. 이것이 박정대식 예술적․ 정치적 쟁투이다.”(문학평론가 엄경희)
“왜 좋은지 모르는 사랑스러운 말들에는 혁명이 있고, 망명이 있고, 음악이 있고, 삶이 있고, 철학이 있고, 시가 있다. 낭만주의자 박정대의 면모다.”(시인 함성호)
“박정대의 시는 <정통 집시>의 영혼에서 흘러나온 충만한 악절처럼, 미묘하고 아름답고 미끄럽다. 어둡게 타오르다 스러지는 청춘의 재처럼, 모든 경험의 끝이 슬픔처럼.”(문학평론가, 시인 허혜정)
“그의 음악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사곶 해안을 지나 하노이와 아무르 강가를 거쳐 아프리카의 초원을 또 지나가면, 이 눈먼 무사의 음악은 어느 황홀한 지명에 닿는 것일까.”(시인 이장욱)
“박정대가 초지일관 읊어대는 ‘혁명’과 ‘고독’, 그리고 그것들의 발인자로서 두서없이 나열되는 그 많은 고유명사들은 현세에도 영원히 죽지 않는 모반의 공모자들로서 이 세계를 참견하고 시비 걸고 불안하게 한다.”(시인 강정)
‘혁명’ ‘탈주’ ‘고독’ ‘모반’ ‘눈먼 무사의 음악’ ‘망명’ ‘방랑’ ‘낭만’과 같은 코드는 ‘역동적인 미학성’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런데 그런 코드들은 하나로 귀결되지 않고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번 열한 번째 시집에서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이번 시집의 표4를 쓴 김이듬 시인의 말은 약간의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대는 폭설이며 불꽃이고 음악이며 침묵, 고독이다. 사랑과 연민에 미친 혁명가다. 그의 모든 노래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가는 급행열차다. 그는 불꽃과 눈송이로 이루어진 유일한 기타로 감정의 무한대를 향해 달려간다.”
박정대 시 세계의 밑바탕에는 사랑이 있고, 매 시집마다 다른 ‘감정의 무한대’가 펼쳐지고 있음을 김이듬 시인은 감지했다. 사랑은 모든 혁명의 분출을 주도한다. 거기에 더해진 ‘감정의 무한대’는 그의 시가 정적인 자리에 놓이지 않고 동적인 자리에 놓이게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감정의 무한대’는 단순히 상상력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박정대가 가진 파토스적인 정서를 동반하기에 그의 언술은 끊임없이 촉발하는 미학적 아우라를 갖는다.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은 안주하지 않고 진행형의 시 세계를 펼치는 박정대의 성향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그가 가진 미학적 아우라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 시집을 권한다.
<시집 속 시 맛보기>
폭설이 올 때 오랑캐의 말은
박정대
이절 44번가 이절에서의 눈송이 낚시에는 여러 대의 기타가 놓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연주하고 싶은 것은 불꽃과 눈송이로 이루어진 한 대의 기타
내가 기타를 연주하면
그 소리는 허공을 가로지르며 폭죽처럼 터지고
밤의 심장으로부터는 폭설이 쏟아질 게야
폭설이 올 때 오랑캐의 말은
어디로 가는가?
고독 고독 말발굽 소리를 내며
감정의 무한을 향해 달려가겠지
밤새 폭설이 내려 지상의 들판을 하얗게 덮어갈 때
눈 속으로 또 다른 눈이 내려 침묵 침묵 쌓여갈 때
세상에 없던 문장 하나가 불꽃처럼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아침이 눈송이처럼 밝아오고 있을 것이다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 달아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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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낭만적으로 인사하고
우리는 고전적으로 헤어진다
박정대
한때 모든 노래는 사랑이었다
한때 모든 노래는 혁명이었다
모든 노래는 사랑에서 발원하여 혁명으로 가는 급행열차였다
반짝이는 차창의 불빛조차도 일종의 혁명을 닮아 있었다
나는 그리움의 힘으로 마시고
설움의 목울대로 노래하였으나
그 어떤 것도 세상을 위한 복무는 아니었다
내가 떠나온 그 무엇을 위해서도 복무하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 복무했으니
오 미천하고 비루했던 사랑이여
나는 이제 이 별에서의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나의 이제 이 별에서의 이별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다른 곳에 있고
나는 여전히 이 행성의 삶에 속하지 않으니
나는 이제 내 작은 숲으로 가야겠다
그곳에서 빛의 음악을 들으며
햇살의 은빛 파도를 서핑하려니
이것은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그것은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저것은 끊임없이 이 거리로 착륙해오는 차갑고도 뜨거운 불멸의 반가사유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 달아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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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박정대
참 무모한 꿈을 꾸었구나
그러나 아름다웠던 꿈
꿈에서 깨어나 물 한 잔 마시고
고요히 담배를 피우는 새벽에는 홀로 생각한다
참 무섭도록 아름다운 꿈을 꾸었구나
꿈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꿈의 바깥도 늘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날씨는 엉망이었으나
가져가야 할, 내가 꾸려가야 할
생의 낱낱의 조각들 속에서
그래도 끝까지 챙길 것은 그대의 이름
참 무모해서 무섭도록 아름다운 꿈을 꾸었구나
꿈에서 깨어나 다시 먼 꿈을 바라보나니
생은 급류에 휩쓸려와
세월의 강변에 버려진 작은 돌멩이 하나
단단하고 외로웠던 것
너도 꿈을 꾸었겠지
고단하고 외로운 꿈
무섭도록 아름다웠던 꿈
―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 달아실, 2023.
박정대 시인의 열한 번째 시집 『눈 속을 여행하는 오랑캐의 말』 달아실시선으로 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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