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첫 시집 『태양중독자』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은림 시인이 돌아왔다. 이전의 시들이 차돌처럼 단단하면서도 만질만질한 감수성으로 빛났다면, 이번 시집은 더욱 깊어진 정서와 따뜻한 교감으로 한층 성숙해진 시 세계를 선보인다.
시인은 일상의 경계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마주침을 시적 사건으로 발견해낸다. 이러한 시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가도 짐작할 수 있다.
이은림 시의 주요 소재는 꽃과 새, 고양이, 새, 고래, 펭귄, 공룡, 악어, 얼룩말 같은 동물, 그리고 사과, 토마토, 구름, 달 같은 자연적 대상이다. 그는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 내고 사유할 줄 안다. 그것들의 고유한 성질이나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하고 많은 ‘인용’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뉴스, 영화, 그림책, 신화, 시, 그림, 노래 등 인용되는 텍스트의 종류나 장르도 무척 다양하다. 이것들 또한 시인의 일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또 다른 장치이다. 그만큼 이은림 시인은 시로 끌어안는 모티브나 요소들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별’이나 ‘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달’이 매일 어떻게 변하는가를 인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고, ‘별’을 하나의 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관계, 즉 ‘별자리’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런데 이은림 시인은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적 대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고 있으며, 그림책, 영화, 애니메이션, 시 같은 다양한 텍스트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이러한 마주침의 순간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긍정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고, 시 세계가 갖는 자장을 넓혀나간다.
다양한 시적 소재와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는 특별한 읽을거리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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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크고 깊은 서랍
이은림
서랍은 늘 조금씩 열려 있습니다.
들키기 쉽게
아니, 들킬 수 있도록.
누구도 자신의 서랍은 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게만 사각지대거든요.
서랍에는 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담론부터
거대하고 자의적인 농담까지
어쨌거나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이력들.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서랍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 제법 오래 관찰 중이었던 것 같은데요.
내 서랍이 그 정도로 크고 깊은 걸까요.
서랍에 대해서는 지극히 제한된 표현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펜과 붓을 들고 있고요.
서랍은 고의적으로 들통납니다.
내 서랍은 순식간에 그림으로 증명되겠지요.
서랍을 열자마자 날아오르는 파랑새라니요,
그래서 등 뒤가 그토록 가려웠던 걸까요.
이번엔 내 방식으로 누군가의 서랍을 열겠습니다.
조금 넓어진 입구로 한껏 풍경을 읽은 후,
옮겨 적어 볼까 합니다. 이를테면, 詩랄까요.
―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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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이은림
네, 반가워요. 안부 물어 줘서 고마워요. 바다요? 간혹 가요. 두 시간만 운전하면 바다에 닿거든요. 아이들도 좋아해요. 바다에 가면 금방이라도 고래를 만날 거라 믿는 아이들이죠. 네? 아니에요, 이젠 어떤 커피든 상관없어요. 경치 좋은 곳엔 어딜 가나 카페가 있어요. 언젠가 7번 국도의 모든 커피를 다 맛볼 수 있겠죠. 커피를 마시며 시라도 쓰겠죠. 아이들이야 깔깔대며 모래밭을 달릴 테고요. 그곳이 동해든 서해든, 아무튼 바다니까요. 그저 고래를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질주하는 아이들이니까요. 네? 어떻게 알았어요? 그래요, 해 질 무렵이면 서해를 향해 핸들을 돌리고 싶어져요. 노을에 닿으면 좀 아프긴 하겠죠. 그건
여전해요.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가시 돋친 넝쿨이 가끔씩 나를 덮겠지만요, 넝쿨에 친친 감기는 거, 숨 막힐 때까지 나를 가두는 거 좋아요. 벽이라 여기고 기대면 바닥이니까. 드디어 바닥이구나, 생각하고 한숨 자요. 내 잠의 바퀴는 속도를 내며 내 안을 달리죠. 그렇게 달리듯 자고 일어나면 넝쿨은 잠잠해요. 더 이상 찌르지 않거든요. 맞아요, 어제도 그랬는걸요. 아마 당신을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고마워요. 정말이에요,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아무튼, 괜찮아요.
*피겨선수 김연아가 마지막 올림픽(러시아 소치) 때 인터뷰에서 한 말
―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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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은림
우리, 통성명은 하지 말자
너는 그냥 지나가는 돈키호테
산초도 로시난테도 없이
야윈 길 위를 뚜벅뚜벅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가볍게 악수나 나누고 말자
맞잡은 손을 한 번 두 번 세 번 흔들고
그저 돈키호테처럼 가던 길 가면 되는 거지
정말이야, 알고 싶지 않아
이름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외로워져
외로움은 뾰족하고
외로움은 따뜻하며
외로움은 덜 닫힌 창문
언제든 닫을 수도 열 수도 있겠지만
창문 아래 기웃기웃 피어나는 꽃들
어제까지는 그냥 꽃이었던 꽃들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왜 알려 줬어?
원추리, 라고 저 꽃들을 호명하는 순간
너의 긴 그림자는 돌아설 테고
나는 산초나 로시난테가 되고 싶어질 거야
분명 네 시선은 풍차만큼 높은 곳에 있을 텐데
제발, 지나가 버릴 어떤 사람들에게
이름 따윈 없었으면 좋겠다
잊은 줄 알았던 이름 따위에
고개 돌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 2023.
이은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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