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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10. 2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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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라 별자리를 읽는 시인

 

 

 

하린 기자

 

첫 시집 태양중독자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은림 시인이 돌아왔다. 이전의 시들이 차돌처럼 단단하면서도 만질만질한 감수성으로 빛났다면, 이번 시집은 더욱 깊어진 정서와 따뜻한 교감으로 한층 성숙해진 시 세계를 선보인다.

 

시인은 일상의 경계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마주침을 시적 사건으로 발견해낸다. 이러한 시적 여정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가도 짐작할 수 있다.

 

이은림 시의 주요 소재는 꽃과 새, 고양이, , 고래, 펭귄, 공룡, 악어, 얼룩말 같은 동물, 그리고 사과, 토마토, 구름, 달 같은 자연적 대상이다. 그는 그것들을 제대로 읽어 내고 사유할 줄 안다. 그것들의 고유한 성질이나 차이를 감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과 관계를 맺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다양하고 많은 인용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뉴스, 영화, 그림책, 신화, , 그림, 노래 등 인용되는 텍스트의 종류나 장르도 무척 다양하다. 이것들 또한 시인의 일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기 위한 또 다른 장치이다. 그만큼 이은림 시인은 시로 끌어안는 모티브나 요소들을 풍부하게 갖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별이나 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이 매일 어떻게 변하는가를 인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고, ‘을 하나의 개별적 대상이 아니라 관계, 별자리로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런데 이은림 시인은 동식물을 비롯한 자연적 대상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살고 있으며, 그림책, 영화, 애니메이션, 시 같은 다양한 텍스트를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이러한 마주침의 순간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긍정하려는 태도를 보여 주고, 시 세계가 갖는 자장을 넓혀나간다.

 

다양한 시적 소재와 가능성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는 특별한 읽을거리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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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크고 깊은 서랍

 

이은림

 

 

서랍은 늘 조금씩 열려 있습니다.

들키기 쉽게

아니, 들킬 수 있도록.

 

누구도 자신의 서랍은 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게만 사각지대거든요.

 

서랍에는 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담론부터

거대하고 자의적인 농담까지

어쨌거나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이력들.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서랍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 제법 오래 관찰 중이었던 것 같은데요.

내 서랍이 그 정도로 크고 깊은 걸까요.

 

서랍에 대해서는 지극히 제한된 표현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펜과 붓을 들고 있고요.

 

서랍은 고의적으로 들통납니다.

내 서랍은 순식간에 그림으로 증명되겠지요.

서랍을 열자마자 날아오르는 파랑새라니요,

그래서 등 뒤가 그토록 가려웠던 걸까요.

 

이번엔 내 방식으로 누군가의 서랍을 열겠습니다.

조금 넓어진 입구로 한껏 풍경을 읽은 후,

옮겨 적어 볼까 합니다. 이를테면, 랄까요.

 

―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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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이은림

 

 

, 반가워요. 안부 물어 줘서 고마워요. 바다요? 간혹 가요. 두 시간만 운전하면 바다에 닿거든요. 아이들도 좋아해요. 바다에 가면 금방이라도 고래를 만날 거라 믿는 아이들이죠. ? 아니에요, 이젠 어떤 커피든 상관없어요. 경치 좋은 곳엔 어딜 가나 카페가 있어요. 언젠가 7번 국도의 모든 커피를 다 맛볼 수 있겠죠. 커피를 마시며 시라도 쓰겠죠. 아이들이야 깔깔대며 모래밭을 달릴 테고요. 그곳이 동해든 서해든, 아무튼 바다니까요. 그저 고래를 만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질주하는 아이들이니까요. ? 어떻게 알았어요? 그래요, 해 질 무렵이면 서해를 향해 핸들을 돌리고 싶어져요. 노을에 닿으면 좀 아프긴 하겠죠. 그건

여전해요. , 아니에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가시 돋친 넝쿨이 가끔씩 나를 덮겠지만요, 넝쿨에 친친 감기는 거, 숨 막힐 때까지 나를 가두는 거 좋아요. 벽이라 여기고 기대면 바닥이니까. 드디어 바닥이구나, 생각하고 한숨 자요. 내 잠의 바퀴는 속도를 내며 내 안을 달리죠. 그렇게 달리듯 자고 일어나면 넝쿨은 잠잠해요. 더 이상 찌르지 않거든요. 맞아요, 어제도 그랬는걸요. 아마 당신을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고마워요. 정말이에요, 안 괜찮아도 괜찮아요, 아무튼, 괜찮아요.

 

*피겨선수 김연아가 마지막 올림픽(러시아 소치) 때 인터뷰에서 한 말

 

―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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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은림

 

 

우리, 통성명은 하지 말자

너는 그냥 지나가는 돈키호테

산초도 로시난테도 없이

야윈 길 위를 뚜벅뚜벅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가볍게 악수나 나누고 말자

맞잡은 손을 한 번 두 번 세 번 흔들고

그저 돈키호테처럼 가던 길 가면 되는 거지

 

정말이야, 알고 싶지 않아

이름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외로워져

 

외로움은 뾰족하고

외로움은 따뜻하며

외로움은 덜 닫힌 창문

언제든 닫을 수도 열 수도 있겠지만

 

창문 아래 기웃기웃 피어나는 꽃들

어제까지는 그냥 꽃이었던 꽃들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왜 알려 줬어?

원추리, 라고 저 꽃들을 호명하는 순간

너의 긴 그림자는 돌아설 테고

나는 산초나 로시난테가 되고 싶어질 거야

분명 네 시선은 풍차만큼 높은 곳에 있을 텐데

 

제발, 지나가 버릴 어떤 사람들에게

이름 따윈 없었으면 좋겠다

잊은 줄 알았던 이름 따위에

고개 돌리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 2023.

 

 

이은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이은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 - 미디어 시in

하종기 기자첫 시집 『태양중독자』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이은림 시인이 돌아왔다. 이전의 시들이 차돌처럼 단단하면서도 만질만질한 감수성으로 빛났다면, 이번 시집은 더욱 깊어진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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