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1998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고찬규 시인의 시집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가 걷는사람 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소리 없는 소리’를 오래 탐색해 온 고찬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말’과 관련한 탐구와 모색을 더욱 심층적으로 해 나간다. 그의 정제된 언어와 직관은 이번 시집에서도 빛난다. 시인은 상징적 질서로 편입되지 않는 ‘의미의 바깥’이야말로 시와 노래의 출처라고 믿으며, 말만 풍성한 “말잔치 나라”(「달려라 얼룩말」)에 대한 풍자를 작품 전체에 녹여낸다.
해설을 쓴 장은영 평론가가 지적한 것처럼 “거짓이 커질수록 진실에 대한 바람은 간절해지고, 절망이 깊을수록 흐릿한 희망은 선명해”질 수 있다. “말의 위기가 확실할수록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도 분명해지는 건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시의 역설적 진실”이다.
고찬규는 “‘위대한 모순 어록’은 마크 트웨인의 ‘훌륭한 난센스를 쓰기 위해서는 엄청난 센스가 필요하다’와 같은 문장들로 이뤄져 있다 이런 책이 안 팔린다는 것도 상당한 모순이다”(「토마토를 위한 변명‐얼룩말」)라고 말하며 역설의 정신을 일깨운다. 물론 그가 부르짖는 역설의 정신이 도달하려는 종착지는 “부정과 모순을 돌파하는 새로운 말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시집에 수록된 ‘얼룩말 연작’은 말의 위기와 함께 공동체가 봉착하게 될 난관을 예고하는 한편, 우리가 회복해야 할 ‘말’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끝없는 질문인 셈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심장을 향하는 말/촉이 좋은 말/무딘 말/고개 숙인 말/말,/말,/말”(「말들의 거리−얼룩말」) 등 수많은 말 가운데 ‘나’와 ‘너’ 사이에 이음쇠를 만들며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확인하게 하는 말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대나무의 ‘마디’ 같은 것들, 주먹을 쥐게 하고 손가락을 구부리게도 할 수 있는 ‘마디’의 미학이야말로 우리를 연대하게 한다는 점을 주시한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인의 말’도 의미심장하다. 시인는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나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으므로 끝없이 기도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리고 이 ‘기도’란 곧 ‘침묵’이라는 말과 이어지는데, 기도와 침묵이야말로 그가 지향하는 시의 세계라 할 것이다.
이근화 시인이 추천사에서 친히 쓴 것처럼 고찬규는 “자신을 다른 이들과 연결시키는 말, 사람을 살리고 함께 숨 쉬는 말을 찾고”자 한다. 넘치는 말의 폭력으로 삶이 쓰디쓴 계절, 이 시집을 넘기며 “침묵의 진언을 찾는 일”에 기꺼이 동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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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 보기>
허공은 힘이 세다
고찬규
한 점,
점으로 박혀 있는 벌레에게
잎사귀는
완벽한 한 세상
한 점,
점은 구멍이 되어
점점
잎사귀는 벌레 속으로
점점
벌레는 잎사귀 속으로
속절없이 녹음 우거지는
한여름 한낮
벌레도 잎사귀도 간데없고
맴맴
허공만 맴맴
―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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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장마술
고찬규
다들
말이면 다냐고 할 때
말이면 다라고 했다
누구도
말로는 다 못 한다고 할 때
말로는 뭘 못 해, 라고 했다
그들이
말을 타고 담장을 뛰어넘는
마술을 선보이자
다 같이
오리발을 내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순식간에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늪에 빠진 말은 허우적거리고
―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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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피어서 말하고 ― 얼룩말
고찬규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해 왔다
―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 걷는사람, 2023.
고찬규 시집 『꽃은 피어서 말하고 잎은 지면서 말한다』 걷는사람 시인선으로 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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