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정지윤 시인의 시조집 『투명한 바리케이드』가 시인수첩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정지윤 시인은 시조와 시, 동시를 쓰고 있는 멀티미디어 시인이다. 2016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2015년에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시, 2014년에 《창비어린이》 신인문학상에 동시로 등단해 활발한 창작 활동을 하고 있다. 그동안 시집 『나는 뉴스보다 더 편파적이다』 시조집 『참치캔 의족』 동시집 『어쩌면 정말 새일지도 몰라요』를 출간했으며 이번 작품집은 네 번째 작품집이다. 시조집으로 두 번째에 해당하는 『투명한 바리케이드』에서 시인은 “실감이 사라져가는 현대의 공허한 삶을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딜레마를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신상조 문학평론가는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존재한다. 또한 그 사회를 추동하는 자본과 시스템은 완전히 단절하거나 탈출할 수 없는 세계이자 리얼리티로서 우리 앞에 실존한다. 정지윤 시의 미학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한다. 『투명한 바리케이드』를 계기로,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치열하게 인식하고 사유한 시조집을 가지게 되었다.”라고 평하며 사유와 인식의 리얼리티에 주목했다.
시인은 2023년 《시인수첩》 겨울 호에 실릴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찾는 것은 제도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삶’ 그 자체였다. 나의 하루는 일상과 크게 멀지 않은 ‘평범함’ 속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내가 응시하는 현장은 체제가 정당성을 내세워 부당하게 일상을 침범하거나 왜곡하는 곳이다. 나에게 ‘바라다봄’ 즉 ‘응시’는 곧 견디는 순간이다. 나의 ‘견딤’ 속에는 응시와 그것이 내부에 응축시킨 힘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런 힘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느끼고 있는 ‘폭넓은 공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그런 시적 탐구로 인해 시인은 “언어의 덩어리(시)들 속에서 삶의 무게와 동일한 질문과 감동을 만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질문이 곧 답이자 존재의 발현인 시”라고 생각하는 시인은 일상의 삶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와 극적 상황의 총체가 아직 ‘불가사의’한 상태로 뒤엉켜” 있음을 발견하고 그 뒤엉켜진 불가사의한 삶에서 시의 결을 길어 올리는 듯하다. 시가 곧 “선택받은 자들의 빵이면서 저주받은 양식”이라고 인식하는 이번 작품집을 통해 독자들은 정지윤 시인의 바리케이드의 삶이 드리운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시의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응시하는 ‘견딤’과 ‘응시’의 내부에 응축된 시의 힘이 이번 시집을 견인해 가고 있다. 독자들에게 이번 시집은 ‘폭넓은 공감’의 시간을 다감하게 전이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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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인셉션
정지윤
바람도 하나 없이 깃발이 흔들릴 때
기차가 휘어지고 내 몸도 휘어진다
나무들 빠르게 출렁이다
제자리로 돌아온다
보이는 게 전부인 얼굴들 손을 꽉, 잡는다
꿈일까 현실일까 주사위를 던져볼 때
늘 같은 숫자가 나온다면
모두 뛰어내리자
교복 입은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켠 채로
미궁의 바닷속을 헤엄쳐 다닌다
어두운 소용돌이 속으로
아이가 또 뛰어내린다
그제야 다 보여서 알 수 없는 물속 세계
내 귀와 눈과 입을 망치로 두드린다
팽이는 쓰러지지 않고
돌고 있다 끝없이
- 『투명한 바리케이드』,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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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못 볼 것처럼
정지윤
하필, 모란이
또 붉게 피었습니다
빗소리 어두운데
미친 듯 흔들리는 잎들
대책은
아직 없습니다
오래 서서 맞는 비
창백한 병실 벽엔
어떤 색을 칠해야만
덩굴 속 숨어버린
기억들이 돌아올까
스스로
그린 벽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들
아무 표정 없이
축축한 저 건너편
봄비가 내리는데
당신은 오지 않고
나 홀로
피어납니다
다시는 못 볼 것처럼
- 『투명한 바리케이드』,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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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웃지 않았다
정지윤
대학 찰옥수수
빈틈이 전혀 없다
비슷한 얼굴들이
단단히 줄지어 있다
뜨거운
밥솥에서도
흩어지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은 몇,
분명히 있었을 텐데
옥수수를 삶으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아파트
불빛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었다
- 『투명한 바리케이드』, 여우난골, 2023.
본지 기자 정지윤 시인, 시집 『투명한 바리케이드』 시인수첩시인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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