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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일 시인의 첫 산문집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문학수첩에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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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3. 11. 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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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일상에서 끌어 올린 아름다운 문장, 섬세한 사유

 

 

하린 기자

 

2007문학수첩시 부문 신인상과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병일 시인이 첫 산문집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문학수첩, 2023)을 펴냈다. 그동안 이병일은 시집 옆구리의 발견(창비, 2012),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창비, 2016), 나무는 나무를(문학수첩, 2020) 등을 발간하면서 자연의 생명력과 고요한 서정의 울림을 꾸준히 보여주는 시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런 시인의 기질이 산문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에 매혹당하는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276)는 말 그대로 이 책에서 시인은 자연과 일상에서 발견한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억들과 단상들을 섬세한 언어로 펼친다. “작고 눈부신 동식물들, 눈에 보이지 않거나 아직 말해지지 않은 아름다움에 대한 엉뚱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이병일 시인. “신통찮은 문장으로 아름다움이 사는 반대쪽까지 내다볼 심산이었으나 괜히 아는 척하다가 눈꼴사납게 될까 봐 차돌 같고 옹이 같은 눈으로”(‘작가의 말’) 겸손하게, 가만가만 대상들을 관찰하고 직관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숨 가진 것들의 안위를 살피는”(284) 태도로 정성껏 부려놓은 문장들은 AI에서는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사유와 감성의 잔잔한 파장을 지니게 되었다.

 

나를 위로해 주는 것들안에는 시인 자신이 위로를 받은 대상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과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도 실려있다. 시인이 말하는 사소하고 시시한 아름다운 것여러 층위를 가진 빛이 있고 색이 있봄산’(10)일 수도 있고, “엎드린 자가 벽 너머를 생각하고 누워있는 자가 천장 너머를 보는” ‘시골집 방’(26)일 수도 있고, “너무 깊어 아홉 자식의 눈물을 모아 쏟아부어도 다 채워지지 않을 것같은 아버지의 쇄골’(98)일 수도 있다. 이런 문장은 실제 체험과 함께 그것에 밀착하여 정말로 사랑을 해야만 나올 수 있는 언술이다.

 

그는 어릴 적 시골집에서 칡소와 돼지를 키웠던 일, 사슴벌레와의 만남, 거미줄로 만든 잠자리채 등에 관한 추억들을 온기가 서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이 가진 의미를 살아있게 만들어낸다. 이렇게 자연과 일상에서 끌어낸 이병일 시인의 아름다움과 사유은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과 가축 또는 곤충, 벌집, 나무 같은 자연물에서 위로받은 소소한 기억들을 소환한다. 그 소환한 것들을 통해 독자들을 극적이거나 화려하진 않아도,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의 소중한 가치를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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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속 문장 맛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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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떼가 밤나무의 심장이고 밤나무의 목소리이고 밤나무의 그림자다. 나는 목청을 따러 밤나무 숲으로 갔다. 사다리를 타고 밤나무에 올라서 벌집 구멍을 찾았다. 꺾인 나뭇가지가 주먹만 한 구멍을 아귀가 꽉 맞듯 가리고 있었다. 눈발도 출입문을 두드리다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벌집이다. 나는 곤하게 겨울잠에 들었을 꿀벌을 깨우는 대신, 큰 눈 오면 가지가 찢어질 것 같아 벌집 입구만 남겨놓고 썩은 나뭇가지를 잘라주고 사다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18, ‘밤나무와 달항아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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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나 비애는 얼룩으로 남지만 재첩국은 아버지 몸에 난 저승꽃을 지운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서 녹아 없어지고, 숨을 쉬는 것들은 저렇게 온갖 에너지의 파편으로 되살아난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아직도 검은빛을 띤 이유다. 아버지 역시 폐허에 대한 편견도 없이 살아왔으니, 이미 죽은 옆구리로 삶이 헛되지 않도록 꼿꼿이 서고자 했다. 산에서 자란 아버지와 물소리로 자란 어머니는 눈길 자주 닿는 곳에서 운명이 정한 자식을 아홉이나 두었다. 속이 다 비치지는 않지만 새파랗게 투명해서 침묵을 편애하는 자식을 두었다.(33, ‘수각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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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흰 얼굴과 붉은 얼굴을 가진 돌멩이인데, 그 돌멩이에겐 냄새와 감정이 있고, 목소리도 있다. 항상 주름으로 가득한 세상을 담고 있어 단단한 것인데, 그것이 내 몸속으로 들어와 순간에 집중하는 힘을 주었다. 팥은 나를 지나 어디로 가는지 한 숟가락 떠서 씹지도 않고 목으로 넘겼는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위로였다. 목을 마르지 않게 하는 힘이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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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하는 사람이 홀연히 어떤 대상을 응시하고 의미 있는 어떤 순간을 포착할 때, 아름다운 인간이 된다고 믿는다. 보리수나무는 나무로만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잊지 않되 현실에 몸담을 수 있으며 앞으로 해야 할 삶의 일이 무엇인지 고찰하게 해준다. 끝없는 일상에 대한 기억을 미각으로 말하기. 저 보리수나무는 어디에나 있겠지만 그 어디에도 물돌 같은 파리똥은 없을 것이다.(126, ‘보리수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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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버드나무를 끝없이 바라보면 불곰이 보여주는 말과 표정을 읽어낼 수 있다. 그건 생명의 신비를 잘 느끼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영원을 향해 기어가면서도 저 버드나무는 뚱뚱해서 눈부시고, 더덕더덕 붙은 고독으로 스스로 불곰인지 불러보며, 얼굴을 바꾸고, 몸과 발그림자를 바꾸고, 물의 세계를 성성하게 비추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버드나무가 저녁마다 불곰으로 몸을 바꿔 움직인다고 해도 도망가진 않을 것이다. 바로 첨벙거리는 소리 때문에 금방 눈에 뜨일 테니까. 저 불곰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내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186, ‘불곰과 버드나무의 애니미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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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진흙머리였다가 온순한 맨발이었다가 물새의 얼굴이었다가 눈먼 고인돌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 달은 변신의 귀재였다. 오래 더럽혀져도 달은 노랗게 맑은 달이다. 달빛은 왜 자질구레한 것들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영혼이라는 말은 저 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달은 물질이 아니므로 삼키지는 말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저 빛이 미늘이다. 한 번 꿰이면 평생 노숙의 몸으로 살아야 한다. 물고기 아가미가 꽃잎같이 붉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193, ‘달밤에 반응하는 것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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