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네잎 기자
2012년 《시로여는세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집 『야비해지거나 쓸모없어지거나』, 동시집 『여름 아이』를 출간하고,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최휘 시인이 두 번째 시집 『난, 여름』을 펴냈다.
최휘 시인은 등단한 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아직은 보여 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훨씬 더 많은 가능성으로 가득찬 신인이다. 그만큼 시를 향한 에너지가 충만하다는 의미다. 스스로도 시인의 말을 통해 “나, 아직 여기 있어요”라며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선언한다.
『난, 여름』에서 최휘 시인은 억압된 현실을 놀잇감으로 만드는 이야기의 힘을 발휘한다. 직설적 화법이 아닌, 화자를 통해 이야기하는 방법과 태도를 통해 시의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다. 김기택 시인은 해설에서 “두 번째 시집 『난, 여름』을 읽다 보니, 여전히 첫 시집의 삐딱한 상상력과 활기와 탄력이 느껴지면서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법은 더 진화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며 생동하는 감각과 감정을 따라 스스로 주체가 되어 제 길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이 시집 곳곳에 가득하다고 평했다.
“이야기에는 금보다 더 귀한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는 지금 그것을 건드린 것 같”(「그린게이블즈의 앤이라면 이렇게 말할걸요」)다는 최휘 시인. 그는 “백련사 가는 오솔길 마삭줄 감긴 바위에 앉아”(「기약도 없이 찾아오는 이를 위해 밤 깊도록 문을 열어 두었다」) 이야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행위는 수동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의 여러 충만한 에너지가 스스로 깨어나고 운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깊이있는 지향성을 띤 방식이다. 시적 상상력이 스스로 제 본성대로 움직이는 독립적인 생명체로써 활동하도록 변화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살아서 꿈틀거리는 시어로 가득한 매력 있는 『난, 여름』을 만나는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호두 혹은 화두
최휘
호두가 짖는다 화두가 짖는다 짖다가 커진다 커진 호두가 제 옆의 화두를 향해 짖는다 놀란 화두가 다른 호두를 향해 짖는다 컹컹 짖는다 한 호두가 한 화두가 가만히 있어, 소리친다
호두가 아니 화두가 바람을 끌어들인다 넓고 둥근 이파리로 호두가 화두를 덮는다 화두가 호두를 감춘다 호두가 가만히 흔들린다 이파리로 제 반쪽만 덮은 호두는 화두에게 밀려난 호두인가
화두가 호두를 본다 호두가 화두를 생각한다 호두가 화두만큼 커진다 화두가 브로콜리만큼 작아진다 호두나무의 뿌리가 축축한 화두를 더듬는다 호두들이 화두들이 간지러워 몸을 튼다 한 화두가 너무 간지러워 제 머리통을 툭 자른다
호두의 한때가 지금이라고 외치는 호두 피곤한 화두 퉁퉁 부은 화두 쓰러진 호두를 일으켜 세우는 화두 원칙적인 호두 밤새 토하거나 나사로 조이는 것 같아 이삼 분 간격으로 울부짖는 화두
호두들이 화두들이 밤을 건너간다 한 화두가 생각한다 이상하다 머리가 아픈데 왜 명치끝이 답답할까 화두는 옆에 있는 호두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대 본다
호두가 살며시 이파리를 끌어다 덮는다 화두가 뒤척인다 꿈인가 호두가 중얼거린다 화두가 다시 머리통을 잡고 뒹군다 호두의 창문이 환하게 밝아 온다 너덜너덜해진 것들이 곯아떨어지는 화두의 새벽
저 화두를 지게막대기로 후려쳐 모두 떨어뜨려야 한다
― 『난, 여름』,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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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름
최휘
비단뱀이 울창한 여름 나무 아래를
리리리 리리리리 기어간다
피자두가 주렁주렁 열린 자두나무 아래를 기어가며
열흘을 지나야 먹을 수 있대
라고 한다
자둣빛 구름 사이로 멀어진 마음이
두 줄의 비행운으로 지나간다
참 속상했겠다
지나간 날들을 쓱쓱 핥아 주는 바람 같은 말
청포도 참외 토마토 오이 감자 옥수수
함께했던 여름들이 지천이다
여름의 가장자리를 밟으며 뙤약볕 아래를 누비며
아 더워, 라고 말하면
들은 듯 장마가 시작되었는데
이제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면
누군가를 사랑하다가 차라리 나를 사랑해 버렸어
난, 여름
이렇게 말할 거다
― 『난, 여름』, 시인의일요일,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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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최휘
의가 되기 위해 평생을 골몰했나
의가 되어 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나
너의 우리의 사랑의 그들의
뒤는 언제나 빈자리
몇 마리의 새라도 앉혀야 할 은신처
의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깍두기
지금 의는
편두통 안에 한껏 몸을 낮추고 퍼덕퍼덕 야윈 꽁지를 흔든다
낮달처럼 낡아 가는 중이다
몰래 내린 밤눈처럼 고요해지는 중이다
그러나 의는 늘 농담의 언저리 돌기를 좋아한다
말풍선이 비눗방울 같은
허풍선이 뱃멀미 같은
정체불명의 농담 속을 헤엄치기를 좋아한다
끝없이 확대되고 늘어나는 의에는 고향 같은 것이 있다
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는 문밖에
하나는 문안에
저기 또 하나가 오고 있다
― 『난, 여름』, 시인의일요일, 2023.
최휘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난, 여름』 시인의일요일에서 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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