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06년 《현대시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형권 시인이 신작 시집 『내 눈꺼풀에 소복한 먼지 쌓이리』를 걷는사람 시인선으로 출간했다.
이 시집은 현대사회 속 도시인의 쓸쓸함을 처연하게 보여 준다.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물은 대부분 시간에 마모되거나 가난으로 힘겨워하는 모습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힘을 내어 무언가를 해 보려는 몸짓들을 보여 준다. 세상의 중심에서 비켜서 있지만 있는 힘을 다해 현실에 맞서는 사람들. 그들은 초봄의 추위 속에서 조그맣게 솟아나는 냉이 잎 같은 존재들이라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한편, 시집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바다 풍경은 박형권 시의 원천이자 정신세계의 근원이다. “갯벌은 생명의 징후와 예감으로 우글거리는 태초의 대지이자 삶과 죽음이 상호작용하는 세계, 신생과 소멸의 반복이라는 리듬으로 화음을 이룬 하나의 우주”(이병철 평론가)다. 그래서 박형권이 노래하는 ‘갯벌론’은 의미심장하다. 이를테면 「그리움좌」의 주인공은 “우주를 그려 달라”고 하는 아이에게 “바지락조개 껍데기에 은하수와 카시오페이아자리와 북두칠성을 그려 넣어” 주고, “우주는 작을수록 크다는 걸, 블랙홀처럼 작은 것들이 우리를 빨아 당긴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 그런가 하면 「비, 포구에서 내리는」이라는 시에서는 “조개잡이 배는 왜 이리 늦게 오나/ 이 바다 언제까지 우리 먹여 살리려나”라고 혼잣말하다가, “아, 행진이었다/바지락조개 한 리어카 밀고 끌고 지나간다/ 팔 걷고 밀어 주면 저녁 반찬 얻는다”라며 삶의 통찰의 순간을 아름답게 포착한다.
고독과 가난을 평생 옷처럼 걸치고 산 이들의 삶은 신산하기 짝이 없지만, 박형권은 끝내 “굴에 베인 상처로 끓인 국 한 그릇으로/나는 예순 살이 되도록 달다”(「왜 굴을 꿀이라고 하셨는지」)라고 선언한다. 어쩌면 상처로 끓여낸 조갯국 한 사발 같은 것이라서 그의 시가 이토록 미더운지도 모른다.
추천사를 쓴 정우영 시인은 박형권의 시에 대해 “가난하되 가난하지 않고 허기지되 허기에 굴복하지 않는다. 당연하게 절망조차 절망의 나락에 빠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시집은 화려한 세계의 이면에 존재하는 하찮고 작은 것들을 보여 주며 그 안에 든 소중한 우주를 우리 함께 들여다보자고 권한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비 내리는 이사
박형권
지금 난 이삿짐 옆에서 담배를 피우네
빗소리와 얼크러진 니코틴이 희미한 악수를 청하네
어제 널어 두었던 구멍 난 양말과
뜯어 보긴 했지만 사용하지 못한 즐거운 연애도
라면 상자에 포장되어 있네
이사를 위해서 몇 가지는 버렸네
이 동네에 들어와 아옹다옹 싸우다가도 돌아서면 잊어버리자고
부지런히 돌렸던 시루떡의 행방을 모르겠고
비바람이나 피하자고 지붕 한 귀퉁이 얻어
꼬박꼬박 바친 윌세 34만 원은 누구의 배 속에서 이자를 벌고 있는지
사람 좋아 보이라고 벙글벙글 웃었던
그 아까운 웃음이
골이 깊은 골목에서도 메아리로 돌아오지 않아
웃음마저 버렸네
새로 이사 갈 집에는 한 평 남짓 텃밭과 옆에 감나무 한 그루 서 있으면 좋겠네
이제 내 등 짝을 갈아엎어 오이 심고 부추 심는
낭만을 버리고
그 낭만 위로 별빛 쏟아지는 꿈도 버려야겠네
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하수도 냄새도 나고 찢어지게 우는 아이도 있고
빛바랜 옷들도 옥상에서 펄럭여 내 식구들이 쉽게 적응할 것 같네
시끄러운 봉제 공장이 옆에 있어
깊은 잠 들지 않아 좋겠네
나는 아직 이 방에서 신을 신지 못하는데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정든 내 방에 젖은 신을 신고 들어오네
― 『내 눈꺼풀에 소복한 먼지 쌓이리』,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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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와 함께
박형권
눈과 비 사이에 ‘과’가 놓이면
필연 너와 나는‘과’에 짖을 것이다
눈물의 함수와 비슷하게 살아온 우리는
애초에 그런 과였다
함께가 되고 싶은 말 ‘과’
매끄러운 지상의 공기를 마저 마시고
천둥 번개가 번뜩이는 이 소란한 빗속에서
나는 ‘과’의 어깨에 내 손을 얹었다
오늘 오후 2시 10분에
물결처럼 흐르는 길 위에서 ‘과’에 관한 것들이 소포
로 실렸다
우선 비대면이었고 얼굴을 보일 필요가 없는 세상이어서
당분간 나는 편할 것이었다
내 얼굴이 없는 소포들이 마스크를 쓰고 길 위에서 달렸다
길에 관하여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길에서 쓰러진 사람뿐이므로
아무도 길과 길 사이의 접점을 말하지 않았다
직선과 직선, 직선과 곡선, 곡선과 곡선, 또 다른 무엇이 만나
그 지점에서 같아졌을 때 인생의 함수가 가파르게 그려졌다
길과 길 사이에도 ‘과’가 있어서
우리는 어차피 함께 걷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과’는 우리를 엮어 주는 커다란 과정이었다
눈비 오는 ‘과’에게 말한다
그래 줘서 고맙다
― 『내 눈꺼풀에 소복한 먼지 쌓이리』,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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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좌座
박형권
친구 광태에게 호밋자루를 넘겨주었더니 그 바보가 바다같이 하염없는 눈물이나 떨구었지 우리는 조개를 업고 살아야 해, 하고 아주 감칠맛 나게 울었지 세상과 하직하는 것도 아니고 달포쯤 서울 갔다 오려는 것인데 그 난리를 쳤지 그 눈물바다의 늦둥이 아들이 어린이집 숙제라면서 나에게 우주를 그려 달라고 하는 거야 콩알만 한 아이들 가슴에 우리말 사전만큼 불가해한 우주를 토씨도 빠뜨리지 않고 담으려는 선생님은 아마 생각 속이 우주처럼 널찍할 거야 바지락조개 껍데기에 은하수와 카시오페이아자리와 북두칠성을 그려 넣었지 거기에 나만 아는 그리움좌座도 슬쩍 끼워 넣었지 그때 난 알았지 우주는 작을수록 크다는 걸, 블랙홀처럼 작은 것들이 우리를 빨아 당긴다는 걸, 우리들의 조개밭이 사정없이 우리를 막 끌어안으려는 것처럼,
그리움만 품고도 광태는 바다 끝을 열 천 번도 넘게 다녀왔지. 그래서 눈물이 저리 파도치는가
― 『내 눈꺼풀에 소복한 먼지 쌓이리』, 걷는사람, 2023.
박형권 시집 『내 눈꺼풀에 소복한 먼지 쌓이리』 걷는사람 시인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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