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네잎 기자
1993년 《현대시사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소연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촉진하는 밤』을 출간했다. 김소연 시인은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이 있으며, 노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촉진하는 밤』은 돌아올 수 없는 데까지 걸어가 만나는 극단의 ‘밤’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극단의 ‘밤’은 잠들지 못한 우리에게 완전한 암흑 속에서 나(i)와 마주 앉는 시간을 열어준다. 그러면 “가장 먼 곳에 사는 사람”(시인의 말)이 깊은 내면에서 건져 올린 사유를 우리에게 조곤조곤 말한다. 시집 해설을 맡은 김언 시인은 “먼 곳이 나의 내면에서 가장 깊숙한 곳과 맞닿을 수 있다면, 나에게서 가장 먼 곳이 곧 나에게서 가장 깊숙한 곳이라”고 말하며, 김소연의 시 세계가 가진 지향점과 깊이를 제시했다.
시인이 촉진하는 밤은 어떤 ‘밤’일까? 시집을 관통하는 ‘밤’은 특별하다. “밤의 풍경과 사유가 깊고도 두텁게 덧칠된 채로 등장한다.”(김언 시인) 시인은 “온갖 주의 사항들이 범람하는 밤에게 굴하지 않(「푸른얼음」)”겠다는 강한 의지를 품고 나아간다. 시인의 밤은 끝까지 갈 때마다 끝이 없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도 다시 생겨나는 끝이 여력을 만들고 의지를 만들고 또 믿음을 만든다. 이 믿음을 받아주는 곳에 다시 ‘밤’이”(김언 시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밤이 지나면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나고, 우리는 새로 태어날 수 있다.
“땡볕 아래 달구어진 뜨거운 돌멩이 하나를 집어 호주머니에 넣고”(「해단식」) 시인으로 30년을 걸어온 김소연 시인. 그가 뜨거운 돌멩이를 언어로 연금(鍊金)한 『촉진하는 밤』은 우리를 깨어 있는 시 세계로 안내한다. i몰래 i없는 시를 쓰겠다는 김소연 시인의 다음 시집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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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촉진하는 밤
김소연
열이 펄펄 끓는 너의 몸을
너에게 배운 바대로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느라
밤을 새운다
나는 가끔 시간을 추월한다
너무 느린 것은 빠른 것을 이따금 능멸하는 능력이 있다
마룻바닥처럼
납작하게 누워서
바퀴벌레처럼 어수선히 돌아다니는 추억을 노려보다
저걸 어떻게 죽여버리지 한다
추억을 미래에서 미리 가져와
더 풀어놓기도 한다
능멸하는 마음은 굶주렸을 때에 유독 유능해진다
피부에 발린 얇은 물기가
체온을 빼앗는다는 걸
너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열이 날 때에 네가 그렇게 해주었던 걸
상기하는 마음으로
밤을 새운다
앙상한 너의 몸을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다
너는 마침내 녹을 거야
증발할 거야 사라질 거야
갈망하던 바대로
갈망하던 바대로
창문을 열면
미쳐 날뛰는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펼쳐둔 책을 휘뜩휘뜩 넘기고
빗방울이 순식간에 들이치고
뒤뜰 어딘가에 텅 빈 양동이가
우당탕탕 보기 좋게 굴러다니고
다음 날이 태연하게 나타난다
믿을 수 없을 만치 고요해진 채로
정지된 모든 사물의 모서리에 햇빛이 맺힌 채로
우리는 새로 태어난 것 같다
어제와 오늘
사이에 유격이 클 때
꿈에 깃들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을 맴돌던 그림자가
눈뜬 아침을 가엾게 내려다볼 때
시간으로부터 호위를 받을 수 있다
시간의 흐름만으로도 가능한 무엇이 있다는 것
참 좋구나
우리의
허약함을 아둔함을 지칠 줄 모름을
같은 오류를 반복하는 더딘 시간을
이 드넓은 햇빛이
말없이 한없이
북돋는다
― 『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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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얼음
김소연
나를 숨겨주는 밤 더 많은 나를 더 깊이 은닉해주는 밤 두 손을 둥그렇게 모아 입가에 대고서 들어주는 사람이 여기에 있다고 소리치고 싶은 밤 과즙처럼 끈적끈적한 다짐들이 입가에서 흘러내리는 밤 모든 게 녹고 있는 밤 누군가가 가리키는 과거가 미래라는 지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가 누군가가 가리키고자 하는 미래가 과거라는 것을 눈치챘다가 미래가 더 이상 미지가 아님을 증명해보는 밤 걸어가보는 밤 모르는 데까지 돌아올 수 없는 데까지 상상도 못 해본 데까지 가는 밤 어플을 켜고서 현재 위치를 파악하고 흘린 땀을 손수건으로 닦고 4차선 도로 한가운데에서 오래 서 있고 고양이의 사체 앞에 오래 서 있고 날벌레들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밤 사로잡히는 밤 형광등 케이스 속에서 죽은 벌레들을 털어냅니다 여름은 참 징그럽지요? 시끄럽지요? 밤은 더하지요? 바깥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당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이런 식이지요? 좋나요? 잘했나요? 뿌듯하지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 좋은 사람을 만들고 좋은 사람이 된 것도 같은 이 밤 신뢰할 만한 인상에 걸맞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 밤 되고 싶지 않음이 오롯해지는 밤 나은 사람 같은 것을 거절하는 밤 ‘우리’라고 말하면서 ‘나’를 뜻하는 것은 공들여 찾아낸 모욕 중의 하나이다.* 저녁에 읽은 문장 하나를 받아 적으며 미소 짓는 관념적인 밤 관념이라는 말이 터무니없어 씨익 웃는 밤 관념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 발자국이 찍힌 눈 위에 또다시 눈이 내리는 일처럼 있는 것을 없다고 하기 정말 좋은 말 일괄 소등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것이 검정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밤 모서리로 밀려나는 밤 가속이 붙는 밤 귀한 것들을 벼랑 끝에 세워둔 것처럼 기묘하고 능청스러운 밤 벨벳 같은 부드러움을 한껏 가장하는 밤 단 한 순간도 고요가 없는 지독히도 와글대는 밤 무성해지는 밤 범람해지는 밤 꿈이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누워 있기 푸른얼음처럼 지면서 버티기 열의를 다해 잘 버티기 어둠의 엄호를 굳게 믿기 온갖 주의 사항들이 범람하는 밤에게 굴하지 않기
*테오도르 W. 아도르노, 「122. 모노그램」, 『미니마 모랄리아』, 김유동 옮김, 길, 2005, p.251.
― 『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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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김소연
잊을 만하면 i가 찾아왔다
우편함에 숨어 있다가 내가 우편함을 꺼내려 할 때
내 손을 꽉 잡고 기어 나오곤 했다
이번엔 달랐다
현관문에 쪽지를 끼워두었다
옥상에서 기다릴게⎯i
오래 뜸하더니 무슨 일일까 고개를 갸웃하며
척척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옥상 철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생일 축하해
i는 파피루스가 담긴
수반을 내게 내밀었다
생일 아닌 거 알아,
네 생일에 올 수 없으니
내가 오는 날에 태어나주렴
i는 치아를 드러내고 크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i에게 수반을 건네받았다
이번에는 나에 대해서 시를 쓰지 마
i는 팔짱을 끼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럼 나는 무엇에 대해 시를 쓰지?
옥상에 대해? 파피루스에 대해?
생일에 대해?
팔짱에 대해?
네가 사라지고 나면
커다란 건물이 한 채 생겨나고
분양 문의 플래카드가 창문마다 나부끼고 있어도
아무도 입주하지 않고
텅 빈 건물 복도에서
텅 빈 우편함에 손을 넣어보고
시멘트 냄새가 나고
내 슬리퍼 끄는 소리를 내가 듣고
아직 아무도 살고 있지 않지만
누군가가 살았으면 하고
i에 대해서 시를 쓸 때마다
그나마 음악도 들었고 약도 챙겨 먹었는데
오늘은 i가 왔는데
나는 태어날 수 있었는데
i를 위해 이불과 베개를 꺼냈다
자고 가라고 말했다
i는 우편함에서 자겠다고
그곳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미 i는 잠들었고
나는 i몰래 i없는 시를 쓰러 갔다
― 『촉진하는 밤』, 문학과지성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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