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01년 『포에지』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이듬 시인이 여덟 번째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문학동네시인선으로 출간했다. 시인은 그동안 시집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등을 발간했고, 시와세계작품상, 김달진창원문학상, 22세기시인작품상, 2014올해의좋은시상, 김춘수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0년엔 『히스테리아』의 영미 번역본으로 전미번역상과 루시엔스트릭번역상을 동시 수상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김이듬 시인은 데뷔 이후 에로티시즘이 돋보이는 도발적인 시편들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기성의 부조리에 일침을 가하는 날카롭고도 명랑한 활기와 변방으로 떠밀려온 존재들을 감싸는 지극한 사랑으로 독창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불합리한 세상을 시로써 자꾸만 들여다본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없다는 체념의 감정이, 이곳에서는 나의 실존을 확인할 수 없다는 미지의 두려움이 화자를 압도한다. 그러나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도, 화자는 기존의 이해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를 다면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은 아닐 터, 그 차이를 알아채기 힘들더라도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며 세계와 존재의 본질을 찾고자 한다. 이 끈질긴 재탐구는 비록 모순된 세상일지라도 사랑하려는 마음과, 상처 입은 존재들을 끝끝내 살아가게 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김이듬 시가 갖는 매력은 시적인 포즈가 없으면서 시적인 자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갖고 있다는 것과 솔직 담백한 어조로 이 시대 사람들이 가진 심리적 결을 자연스럽게 감지하고 드러내는 센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은 일상을 바탕으로 일상적인 언어로 일상을 뛰어넘거나 일상 안쪽을 쓱, 짚어내는 자연스러운 센서를 가진 시집이다. 그런 시들을 읽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시집은 필독서처럼 다가갈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귓속말
김이듬
숨을 거두어도 손목시계가 멈추지 않듯이
사람이 시간에 떠밀려가도 귀의 솜털이 흔들리듯이
죽은 사람의 귀는 얼마간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세상이 당신에게 임종 판정을 내린 후에도
당신은 종말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며
남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신이 지닌 찰나의 지각과 감정은 인간이 수천 년 진화하며
발달해온 능력일까
신이 망자에게 준 선물일까
아름다운 추측이지만 가혹하지 않은가
고백이든 인사든 부탁이든 아무런 응답도 못한 채 들어야 하는 최후의 속삭임들
덜 늙은 염장이가 나를 가리키며 당신에게 할 말 없냐고 물었다
당신은 화구로 내쫓기기 싫었을 것이다
머리카락이 주뼛 설 만큼 창백하게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내 입술은 꿰매진 것처럼 신음만 흘러나왔다
오늘도 나는 당신에게 하지 못한 말을 머금고 있다
얕은 골짜기 연둣빛 잎사귀가 무성한 묘지들처럼
―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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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사람
김이듬
지금도 그는 책상 앞에 웅크려 있다 자신이 만든 기울어진 문장에 빠져 있다 이따금 마당으로 가서 구황작물을 캔다 죽은 토끼를 마당에 묻는다 하루 한 끼 정도는 챙겨 먹는다 그는 웅크려 앉아 손톱을 깎거나 자신을 쓰다듬기도 한다 기도할 때도 있다 자세히 보면 자기 살을 파먹는 사람 같다 밤에 체조를 하고 창밖을 본다
풀과 구황작물 줄기들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 그는 누군가 와 다정하게 찐 뿌리들을 나눠 먹고 싶다 잡목숲을 헤치고 올 만도 한데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는다 그는 울타리도 만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리스 와이어처럼 가늘고 긴 전선으로 마당을 둘렀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제법 개방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왜 아무도 자기에게 오지 않는지 알지 못한다 문을 열었다 닫고 다시 열곤 한다 그의 전선은 기울어졌고 고압 전류가 흐른다
어제는 이웃집 닭이 죽었다 고라니나 멧돼지를 쫓으려고 쳐놓은 그의 마당 전선에 닿아서 당신이 축사 문을 열어둔 게 실수이지 않습니까 그가 파랗게 질린 이웃에게 말했다
지금도 그는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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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에디션
김이듬
기타를 찾으러 갔다 팽나무가 쓰러졌다 기타를 찾으러 갔다 방파제가 무너졌다 기타를 찾으러 갔다 기타가 물에 빠지기 전에 기타를 찾아야 한다 물에 떠내려온 지붕 때문에 다리가 무너졌다 기타를 찾으러 갔다 시가지가 침수되었다 기타를 찾으러 갔다 시가지가 정전되었다 기타를 찾으러 갔다 내가 수리를 맡긴 기타 괴물 같은 기타 센티멘털한 기타
모든 길 잃어도 살아남고 싶은 기타 한정판 기타 이 세상에 너무 많은 기타
―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문학동네, 2023.
◎ 김이듬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문학동네 제공)
Q1.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이 출간되었습니다. 2001년 데뷔 후 여덟 번째 시집인데요. 이번 시집을 선보이는 마음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A: 무척 설레면서도 긴장됩니다. 이번 시집엔 어디에도 싣지 않은 미발표작과 새로 쓴 시가 유독 많아서 독자분들이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해요.
Q2.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이라는 제목을 어떻게 생각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A: 지금까지 출간된 일곱 권의 시집 제목은 저 혼자 결정했어요. 그런데 이번 시집 제목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은 문학동네 편집부 선생님들이 골라주신 몇 개의 제목 중에서 선택한 것입니다. 눈 밝은 편집자분께서 제 문장의 얄팍한 틈에서 제목을 발견해주신 거죠. 감사합니다.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은 확연함의 측면에서 정반대 개념일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유사성이 큰 것들일 수도 있죠. 비가시적인 세계,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 존재, 언어로 지칭할 수 없는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Q3. 시편들에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가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이 세상을 사랑하고자, 사랑하며 살아가고자 하는데요. 이 애증의 감정에 많은 분들이 공감할 것 같습니다. 상처 입으면서도 우리는 왜 다시 사랑하고자 마음을 다잡는 걸까요?
A: 누구나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며 살아가고 있을 겁니다. 저마다 그 감정에 몸부림치거나 해소하려 애쓰면서요. 저는 피를 흘리는 심정으로 시를 쓰면서 세상을 응시하곤 해요. 그러다보면 더러운 웅덩이 같은 저의 내면을 헤엄쳐 탐색할 수밖에 없죠. 좌절감에 휩싸여서도 저는 이 세상과 단절하여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결국 저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조응하며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더라고요. 사랑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사랑은 천차만별의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랑하지 않는 자를 범죄자처럼 보는 사회가 좋은 걸까요? 저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 문제에 더 예민한 편입니다. 자신이 상처받을지라도 타인을 다치게 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Q4. 이번 시집에서는 존재를 다면적으로 바라보려는 화자의 의지가 또한 돋보였습니다. 「클라이맥스 없는 영화처럼」과 같은 시편에서는 “감히 짐작할 수 없”을지라도 숲의 세계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이해해보려고 하지요.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 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존중하려는 화자의 마음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A: “삶은 나이아가라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풀잎 한 줄기의 지배자도 되지 않을 것이며 그 자매가 될 것이다.”(『긴 호흡』, 마음산책, 118쪽)라는 메리 올리버의 말이 떠오르는데요. 저도 보드라운 흙이나 오래된 조개껍데기보다 인간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Q5. 마지막으로,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감상할 독자분들께 인사를 건네주세요.
A: 저의 시는 도구로서의 현실적 용도는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아요. 꼭 그러려던 건 아닌데…… 프로포즈 멘트나 결혼식 축가로 쓸 사랑스러운 작품도 없어요. 시집 제목처럼 거의 공백이죠. 하지만 시집이라는 문손잡이 하나를 열고 들어와 뛰어다니며 조금 재미있어하면 좋겠습니다.
김이듬 시인 여덟 번째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문학동네시인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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