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을 껴안은 채 슬픔의 중력에 맞서는 미학적 태도
하린 기자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휘민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을 걷는사람시인선으로 발간했다.
시의 세계는 간절함을 배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릴수록 내게 소원을 걸어 둘 “크리스마스트리”가 없다는 사실이 선연해지듯이, 구원을 소망할수록 “해수면으로부터 너무 멀리”(「수목한계선」) 있어 아무도 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듯이, “간절함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운명은 번번이 예상치 못한 샛길로 방향을”(「헬리콥터」) 틀고야 마는 것처럼, 시의 세계는 배반의 연속을 통해 스스로를 확장해 나간다. 휘민의 시는 그런 배반의 지점에서 출발하여 미학적으로 배반을 형상화하려는 양상을 갖는다.
슬픔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 다른 슬픔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휘민의 시를 읽다 보면 나의 슬픔과 당신의 슬픔이 얼마나 다른지를 실감하게 된다. 나와 당신이 다른 슬픔의 존재자이기에, “당신과 나는 서로의 반대편에 머물 뿐 가까워지지 않는다”(「적도」). 그러나 시인은 오히려 이러한 어긋남에서 당신과 내가 ‘우리’로 불릴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해 낸다. “제 가슴을 치며 실컷 울고 나서야/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삭(朔)」)는 진술에서 알 수 있듯, 화자에게 눈물은 그 자신의 슬픔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타인의 눈물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외면하지 않고 나의 슬픔을 마주한다면, 당신에게로 다가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안에서 시인은 슬픔 너머 내일의 가능성을 엿본다.
어쩌면 도처에 널린 슬픔 속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건너편을 믿어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신분당선」), 여전히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슬픔을 껴안은 당신과 내가 ‘우리’로 존재할 수만 있다면 “바닥까지 내려가는 슬픔은 절벽의 깊이가 아니라/그 끝을 딛고 버티는 발등의 두께로 기억될 것”(「제2 외국어를 떠올리는 밤」)임을 휘민 시인은 직관한다.
휘민 시인에게 슬픔을 향한 태도는 “금이 간 거울에 나를 비추며/ 끝내 미완으로 남을 고통의 노래를 부르”(‘시인의 말’)는 일일 것이다. 슬픔과 하나가 되어 슬픔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시를 만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중력을 달래는 사람』을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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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삭(朔)
—시절인연
휘민
유리잔 속에 담긴
수많은 탄식과 비명
어떤 목소리는
깨진 유리잔의 공명이 되고
어떤 목소리는
유리잔이 깨지는 순간 움츠러드는
고통의 맥놀이로 마음에 새겨진다
내일을 먼저 보고 온 자의
불안일까
어제를 잊으려는 자의
고투일까
아홉 번의 겨울을 함께 살고도
데면데면하던 우리는
제 가슴을 치며 실컷 울고 나서야
서로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켜보는 달빛이 없어
울기 좋은 밤이다
—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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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당선
휘민
급행열차를 탄다
기관사가 없어도 문이 열리고 닫힌다
맨 앞칸으로 가면
어둠 속을 질주하는 불빛을 볼 수 있다
내시경 카메라가 식도를 훑고 지나가는 것 같다
객실 안은 마스크 쓴 사람들로 가득하다
새로운 풍경이다
어떤 단어에 신이 붙는 것은
새롭다는 뜻일까 다르다는 뜻일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운 좋게 몇 개의 역을 지나쳤지만
미래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내가 비건이 되면 세상에 단 두 마리뿐인
북부흰코뿔소가 멸종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늦게 도착하는 사람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면
이미 그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누군가 기침을 한다
마스크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본다
이 장면에도 신이 존재할까
신동탄까지 내려갔지만
그곳은 동탄이 아니었다
믿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환승역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마스크는 불안의 안쪽일까 바깥쪽일까
—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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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휘민
방 안 깊숙이 달빛이 걸어 들어와 있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굳어 있던 몸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하품을 하며 깨어난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우는 내가 있었다
누가 나의 잠귀퉁이를 흔들어 당신에게 데려갔을까
암실 속으로 들어와 닻을 내린 한 줄기 빛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나는 한밤중에
무릎을 껴안고 중력을 달래는 사람이 된다
짐승 같은 잠 속에 빠져
두 눈을 잃어버린 당신은 달의 뒤편에서
사나운 어둠을 길들이고 있는 사람
홀로 노를 저어 망망대해를 건너가려는 사람
활이 지나간 자리였을까
달빛에 베인 상처였을까
나는 한동안 당신을 생각하느라 어두워진 갈비뼈를 더듬는다
울림통이 된 몸에서 더 이상 어둠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만가만 창가로 다가가 커튼 자락을 여민다
그러나 살갗을 파고드는 먹물처럼
그림자를 지워도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얼룩
온종일 달아올랐던 바닥이 식는지
비틀린 관절을 꺾으며 집이 우는 소리를 낸다
—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 2023.
휘민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걷는사람시인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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