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사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단에 나와 시집으로 『먼지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 『마돈나를 위하여』 『비』를 발간하고 ≪현대시≫ 발행인을 맡고 있는 원구식 시인이 시집 『오리진』을 ‘현대시 기획선’으로 출간했다.
원구식은 “절대 시와 절대 책을 추구”하는 시인이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럼에도 거듭 이를 추구했던 시인. 원구식은 『비』(문학과지성사, 2015)를 발간할 때까지 40년 가까운 창작의 시간을 “습작기”의 결과물이라고 명명하고, “새로운 세계로 갈 것”을 선언한 채, 미학적 자의식을 갖고 시류에 휩싸이지 않는 태도로 묵묵히 자신만의 시 세계를 펼쳐왔다. “세상을 바꿀 단 한 편의 시와 만물의 이론이 적혀 있는 단 한 권의 책을” 위해 “파동으로 가득”찬 세계로 모험을 떠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 『오리진』 안에는 뜻밖에도 “현실에서 저 너머로 떠난 것이 아니라, 저 너머에서 현실로 돌아온”(133쪽) 시인의 노래가 가득 담겨져 있다. 원구식만의 시적 모험이 그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결말로 치달은 양상이다. 그간 무슨 사정이 있었길래 ‘상상’과 ‘환상’으로 채워진 모험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득한 기원의 세계를 노래하게 하게 된 것일까? 혹 여기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시인만의 복잡하고 씁쓸한 어떤 고뇌가 담겨 있는 것 아닐까?
그 이유를 온전히 알고 싶다면 『오리진』을 꼼꼼히 읽어보면 된다. 『오리진』 안엔 시인의 고뇌가 만들어낸 죽음의 세계가 있다. 독자는 이 죽음의 세계를 통과해 시인의 저 고뇌에까지 닿는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오직 죽음이라는 타자만이, 이 필연과 운명만이 우리를 무릎 꿇리게 만들고, 우리를 위대하고도 자유롭게 만”들게 됨(양순모 문학평론가)을 『오리진』은 시로써 내밀하게 증명한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바깥들
원구식
최초의 책은 아마도 하늘에서 내려와
돌 위에 새겨졌을 것이다. 일곱 개의 별이 박힌 이 책을
사람들이 무덤으로 삼았으니, 책이 어찌하여
별의 부적이 아니겠느냐? 산 자들이
그 앞에서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고, 열흘 밤
열흘 낮 동안 점을 친다. 무서울 정도로 단순한
나의 애인아. 진정한 삶은 이 세상에 없다.
몽매한 현자들이 점토판의 진흙이 굳기도 전에
쐐기로 제 두 눈을 찌르고, 하늘의 문자를 모방하여
불멸의 책을 구워냈으나,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색창연한 먼지로 뒤덮인 도서관의 책들을.
형이상학으로 가득한 이 책들은 온통
호명을 기다리는 죽은 아버지들의 이름들뿐!
도둑처럼 날이 저물고, 생각 없는 별이 뜬다.
골짜기의 백합보다 순결한 내 애인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중개하는 밤이 왔다. 죽음으로 봉인된
책이 열린다. 오, 존재가 사라진 공간 속으로
날아오르는 흑조들. 그 뒤로 죽은 아버지들이
전쟁 포로처럼 돌아온다. 이곳은 ‘바깥’들이 모인 ‘바깥’의
바깥들. 존재 없는 존재자들이 사는 곳. 죽은 자들이
산 자를 낳는 곳. 사물들이 모두 거울이 되는 곳.
나는 흑조를 쫓아 절벽 끝까지 내달린다.
순간 절벽이 나를 비추고 흑조가 나를 비춘다. 번쩍번쩍
비추는 대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내 오늘 밤
저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허공에 떠
유물론자와 물질주의자의 차이를 제법 유치하게
말해줄 수도 있지만, 애인이 서둘러 책을 덮는다.
최초의 아버지들이 미지의 행간 속으로 사라진다.
울지 마라. 모두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도서관엔 아직도 먼지를 털어내며 읽어야 할 책들이 수북하다.
옜다, 너도 한 권 가져다가 저잣거리에서
비린내 나는 생선이라도 한 마리 바꿔 먹으렴.
― 『오리진』, 한국문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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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기원
원구식
경배하라.
신성한 금속은 하늘에서 온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우주의 먼지 속에서
새로운 별이 태어나듯,
하늘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그러자 대지가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시퍼런 강물이 순식간에 말라버렸다,
지구의 맨살을 도려낸 듯
땅이 갈라진 자리,
상처를 치료하듯
붉은 용암이 흘렀다.
그날 이후 길흉화복이 바뀌어
자고 나면 새로운 왕들이 나타나
서로를 헐뜯고
전쟁으로 날을 지새웠다.
세상이 충분히 어지러워지자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사방 천 리 땅이 푹 꺼지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분화구 아래
하늘에서 온
아주
단단한
금속이 있다는 것을.
이제 세상을 구원할
한 자루의 칼을 만들 때가 되었다.
― 『오리진』, 한국문연,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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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시간
원구식
식사 시간에는 부디 혀를 조심하오.
맛에만 신경을 쓴 채
정신없이 허겁지겁 먹다 보면
당신은 곧 알게 될 것이오, 어느새
당신의 혀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당신이 씹어 먹어버린 것이오)
입을 열어 이 음식의 예기치 않은 맛을
말하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소.
어디 당신뿐이겠소?
이 음식을 먹은 자는
모두 벙어리가 되고 말았으니
아무도 이 음식의 정체를 모른다오.
(이 음식의 이름은 죽음이오)
잠시 후, 입술과 입 주변이 마비되고
얼굴과 팔다리의 근육을 움직일 수가 없소.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소. 당신은 이미
앉은뱅이가 된 것이오.
(그러니 하얀 식탁보에 공손히 두 손을 올려놓으시오)
잠시 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식탁 앞에 앉을 것이오.
눈을 들어 여인의 얼굴을 보려 하지만
너무 눈이 부셔 볼 수가 없소.
어디 당신뿐이겠소?
이 여인을 본 자는
모두 장님이 되고 말았으니
아무도 이 여인의 정체를 모른다오.
그러나 당신은 이미 알고 있소.
지금 당신이 먹고 있는 음식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임을.
(그러니 즐기시오, 매혹과의 식사를)
― 『오리진』, 한국문연, 2023.
원구식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오리진』 ‘현대시 기획선’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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