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이재훈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돌이 천둥이다』가 K-포엣 시리즈 서른다섯 번째 출간됐다. 이재훈 시인은 1998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그동안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 되다』, 『벌레 신화』, 『생물학적인 눈물』 등의 시집을 펴냈고,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현대시작품상, 한국서정시문학상, 김만중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재훈 시인하면 떠오르는 게 신화적 상상력이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를 ‘거울’처럼 보여주면서, 그런 현실을 살아 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들의 이면을 알레고리화해서 보여주곤 했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선택한 ‘거울’은 돌이다. 수록된 작품들 속에서 돌은 각양각색의 방식으로 등장한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돌. 주인이 없는 돌. 천시하는 돌. 숭배하는 돌. 버리고 모으고 감추고 숨기는 돌”을 오래 매만진 이재훈 시인. 아주 작고 사소한 것, 그래서 어쩌면 소외될 수 있는 것에서 번쩍이는 시원을 발견해내는 힘이 공감과 실감을 자아낸다. 그런 발견의 안쪽에는 세계의 근원과 본질을 탐구하고자 하는 태도가 깔려있다.
〈시인 노트〉와 〈시인 에세이〉를 통해 시인은 어떻게 해서 돌과 만나게 되었는지, 돌에 대한 접근 방법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언술한다. 시를 실제로 읽게 되면 “돌에 대한 상상력”이 “시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면서 시인에게 말을 걸어오는 장면이 떠오른다.
사소하게만 보였던 돌 속에도 어떤 비밀이 깃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발굴하는 일에 시인은 여러 날을 탕진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이재훈 시인은 “이 세계의 시스템에서 배제되거나 낙오된 상태”인 존재들, “침묵하는 존재들”에게 귀를 달아주고 입을 열어주었다. 그들의 슬픔을 헤아리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오은 시인은 같은 맥락으로 “이재훈의 시편에서 돌은 약자를 대변하는 존재”이다라고 말했다.
여기 돌을 정성껏 어루만진 시, 돌에 생명을 불어넣은 시가 있다. 『돌이 천둥이다』를 통해 독자들은 오랜만에 돌처럼 단단한 시와 만나게 될 것이다.
한편, 아시아 출판사는 2012년부터 근현대 대표 작가를 총망라한 최초의 한영대역선집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과 2014년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K-픽션〉 시리즈를 출간하며 한국 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안도현, 백석, 허수경을 시작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시편을 모아 영문으로 번역하고 출간하여, 해외 온라인 서점에서 판매가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한국소설과 한국시가 세계적으로 뻗어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한국 문학의 저변확대가 이루어지도록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눈물로 돌을 만든다
이재훈
태양은 사막을 만들고
구름은 비를 만들고
눈물은 사람을 만든다.
시를 쓰는 사람.
눈물의 사제여.
돌은 복수를 모르고
변신을 모른다.
온몸을 섭리에 맡긴다.
평생 구르는 노동과
몸을 벼리는 일만 안다.
땅의 온갖 죄를 돌에게 담당시켰다.
던지고 차고 묻고 깼다.
썩지 않는 형벌을 가졌다.
침묵을 지키는 몸.
공중에서도 바닷속에서도 땅속에서도
몸을 부딪칠 수 있는 용기.
사람 이전부터 지구 이전부터
우주를 떠돌았을 천형의 몸.
— 『돌이 천둥이다』, 아시아, 2023.
돌이 천둥이다
이재훈
아득히 높은 곳에서 넘친다.
우리들의 간원으로 쏟아지는 소리.
사람을 뒤덮고
소원을 뒤덮고
울분을 뒤덮고
단단한 죄악을 뒤덮는다.
작은 돌이 굴러가는 소리.
머릿속이 눈물로 가득하다.
새벽마다 삼각산 나무 밑에서
방언을 부르짖는 사람들.
맨살을 철썩철썩 때리며
병을 고치는 사람들.
소리는 시간을 앞질러 간다.
엄마, 하고 부르면
한없이 슬픈 짐승이 된다.
아주 오래전
돌로 하늘을 내리치면
벼락이 치고 천둥이 울렸다.
천상의 소리가 대답했다.
울 곳이 없어
돌 속으로 들어왔다.
온몸이 징징 울리는 날들이다.
— 『돌이 천둥이다』, 아시아, 2023.
돌의 재난사
이재훈
당신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요? 그저 과거일 뿐. 왕궁의 기억도 걸인의 기억도.
땅에 있기 전에는 모두 엄마의 팔에 안겼죠. 늑대 무리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당신은 허영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에요.
마굿간으로 가는 길을 아시나요? 당신은 궁륭에 있었어요. 길에서 태어나 채찍에 몸이 패였죠. 누구보다 먼저 종소리를 들었죠.
장대한 땅. 끝없는 바다. 모든 공포 속으로 가보았죠. 세상에는 거인이 너무 많아요.
언어가 오염되고 있어요. 혁신만이 진리라고요. 착한 언어를 쓰시나요. 솔직해지세요. 모든 통곡에는 이유가 있어요.
시기. 불만. 짜증. 정욕. 고통의 언어를 숨기지 마세요. 위로하고 축복하고 싶으면 가장 나은 것으로 해주세요. 위대한 말은 꿈을 나눠 갖는 것이에요.
이 산지에서 저 산지로. 기쁜 발걸음으로. 어렵고 까다로운 말들 사이에서 온몸을 굴러요. 돌로 돌로 가다 보면 침묵을 만날지도 몰라요.
— 『돌이 천둥이다』, 아시아, 2023.
이재훈 시인의 『돌이 천둥이다』, K-포엣 시리즈 서른다섯 번째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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