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데뷔한 김태우 시인이 첫 시집 『동명이인』을 걷는사람 출판사에서 발간했다. ‘동명이인’의 뜻처럼 같은 이름으로 불릴지라도 저마다의 고유한 세계가 있듯, 각각의 온도와 고유한 색을 가진 57편의 시가 『동명이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김태우의 시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프고 견뎌내는 나의 ‘이름’ 따위가 쓸모없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날들”(유현아 시인, 추천사)이 고요하게 떠오른다. 삶과 죽음을 둘러싼 불길한 징후를 집요하면서도 핍집하게 그려내는 시인의 시 세계에선 “내 이름과 점점 멀어”(「동명이인」)지는 것만 같은 상실감과 “버려진 이름들로 휴지통이”(「소문들」) 넘치고야 마는 비극적 풍경이 펼쳐진다.
이렇듯 위태로운 분위기 속에서 “비가 오면/젖는 것”보다도 “비가 와도/ 젖지 않는 사실”(「폐소공포증」)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일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도처에 널린 “죽음을 목격한” 채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기억”(「원치 않아도 일어나는 일들」)을 예감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작지만 분명한 형태를 가진 “세상의 얼룩”(「고고(呱呱)」)으로 규정되며, 김태우는 바로 이 지점을 놓치지 않고 부조리하고도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끈질긴 사유를 거듭한다. 그러니 현실의 불충분함은 인간을 탐구하려는 사색적 모험의 동력이 되며, 이 치열하고도 불확실한 세계는 ‘불면’과 ‘꿈’이라는 망각의 얼굴로 반복해서 형상화된다.
그렇다면 비정한 사회와 유한한 생애를 손에 쥔 인간은 어떻게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시인의 화자들은 그 방법론을 포착하기 위해 사랑에 골몰하는 듯하다. 이들은 인간이 “사랑에 취약한 종족”(「늙은 애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채, “사랑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완성”(「벌 3−감정기계」)된다는 의미심장한 ‘결말’에 당도한다. ‘우리’가 지금−여기에서 세계와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 자체로 사랑이 갖는 유의미함을 얻게 되는 사실을 걸 감지한 시인, “당신이/ 특별한/ 한 사람이 되는 순간”(「시인의 말」)을 기억하고자 하는 시인.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그 자체만으로도 더없는 충만함이 피어오름을 이야기한다.
양병호 문학평론가(전북대 국문과 교수)는 해설에서 김태우 시인이 “실체와 이름의 불일치 현상을 통해 정체성 상실의 현대적 상황을 부각하고 싶”어 하고 있다는 점을 예리하게 분석했다. 무엇보다도 “시인이 인간의 본성, 삶의 가치, 인생의 의미 등을 진지하고 투철한 사색을 통해 직접 검증을 하는 과정이 바로 시집 『동명이인』의 진정한 가치”라는 점을 강조했다.
독자들이 이 한 권의 책을 내밀하게 읽는다면 “깊고 고요하고 적막한 겨울 숲” 같은 풍경 속에서, 도드라지는 사랑과 실존과 생의 의미를 공감대가 풍부한 언어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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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고고(呱呱)
김태우
세상의 얼룩인 당신, 울음에서 격리된 채 첫 눈물을 분실했나요 더 이상 울지 못해 울음마저 배설했나요 당신이 쏟은 세상에는 얼룩 하나 없네요 당신의 방향에서 우리 만나요 출출한 애착이 선택한 텅 빈 울음에서 당신을 찾을게요 얼룩이 흐려지면 좀 더 울 수 있을까요 당신에게 적응하면 흔적이 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당신을 지울 테니 당신의 자국도 함께 숨겨요 처음 본 울음의 이름은 당신, 잉태한 대가는 눈물인데 아무것도 할 수 없네요 차라리 세상에서 우리가 마르면 당신의 결말을 지울게요 삭제된 세상의 얼룩에서, 당신이 뱉은 내가 당신을 뱉을 때까지.
― 『동명이인』,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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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이인
김태우
나보다 늦게 작명소에서 태어난 이름이 있었다.
보자기에 곱게 싸인 채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던 이름이었다.
한번은 학교에서 나와 다른 옷을 입고 있는
내 이름을 처음 보았다.
친구들은 내 이름 주위에 몰려와
내 이름을 귀찮게 했다.
나는 내 이름을 구하려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친구들은 내 이름을 데리고 흩어졌다.
나는 내 이름과 점점 멀어졌다.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낯선 아이가 선생님 앞으로 걸어갔다.
친구들이 손뼉을 치며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내 이름을 보자기에 싼 채
선생님과 낯선 아이 옆을
조용히 지나 교실 문을 나섰다.
나를 잡는 이들은 없었지만
내 이름을 연신 부르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울렸다.
― 『동명이인』,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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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3
― 감정기계
김태우
겨울의 정오가
어김없이 지나간다.
서로 마주 앉아 듣는 빗소리
커피를 마시며 여름을 기다리는 나
문밖을 바라보며 가을을 기다리는 너
너라는 장르에서
가장 예쁜 단어를 골라
네 손에 쥐여 주었다.
나는 너의 흔적을 사랑한지 몰라
사랑을 인질로 잡고
슬픈 설렘만 강요했는지도 몰라
우리는 예쁜 옷을 입고
절대로 찾지 않을 사진을 찍었다.
사랑이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완성되었다.
― 『동명이인』,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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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
김태우
내가 인간을 빌려쓰고
인간이 되었을 때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인간은 나를 가둔 채
인간이라 부르지 않았다
나는 인간에 간힌 죄로
인간이 될 수 없었다
― 『동명이인』, 걷는사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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