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 기자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변혜지 시인의 첫 시집이다. 당선시 「언더독」을 포함한 다수의 시에서 볼 수 있듯 시인은 묵시록적 비전을 들고 현대시의 전경에 새롭게 등장한다. 그의 시는 원환론적 세계의 시작을 알리며 복합 세계의 주인공인 ‘나’를 통해 다중의 역할을 소화해낸다. 반복되고 변주되는 신화를 통해 이미 완료된 대과거와 아직은 수정 가능성이 있는 미래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또한 레고 같은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재앙이자 비선형적으로 되풀이되는 꿈의 장면들을 현시한다. 시인은 사랑이 끝나지 않는 한 멸망 이후에도 초기화되는 움직임들을 통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원하고자 하는 희망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박판식 평론가)
변혜지 시인은 사라지는 모든 것의 이유가 되는 존재의 ‘멸망’을 의인화하여 개인의 재난을 표현한다. “세계를 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속출하는데” “어제보다 어둡기만”(「그거 그대로 내버려둬」) 세상이, 담요 위에 웅크린 멸망이 속삭이고 있다고 직관한다. 이러한 세계의 도래 속에서 우리는 텔레비전과 휴대전화에서 나오는 “커다란 사람들과 아주 작은 사람들을 보며 함께 식사를”( 「브릭하우스」 ) 할 수밖에 없는 외로운 존재로 놓여지게 된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에 홀로 남겨진 사람이” “뺨에 흐르는 눈물을 최대한 맛본 뒤에 눈물의 맛을 적”는 길밖에 없다. 그렇게 변혜지는 아무리 시인을 오독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세계”가 “반쯤 질려버리”는 상황이 오더라도 눈으로 길러낸 것들을 다시 눈 속에 넣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야기가 끝나버려서 더 이상 적지 못하는 상황이 와도 계속 깨달아 갈 자신을 예언하며(「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아무리 많이 팔아도 너덜거리지 않는 자신이 부끄럽겠지만 “풍요는 불행이 지닌” 또 다른 ‘특성’이기에, 남반구 식물을 눈동자에 심는 마음가짐으로 눈을 감고 지켜보면서 “이 고요한 파수의 행위”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한다.(「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시인은 또한 시집 곳곳에서 꿈을 통한 그만의 아브젝트(abject)를 보여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기호계의 코라 속 욕동의 원리에 따르면 아브젝트는 상징계로부터 배제된 것들의 목록이다. 아브젝트의 양가적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어머니의 몸인데 이것은 삶과 죽음을 제공하는 존재이자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내가 되는 꿈」에서 화자는 잠에서 깨어나 학교에 갈 것을 엄마에게 종용받는다. 어제까지도 멀쩡했던 발은 평발이 되었고, 사회화가 화자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꿈’을 지배하는 이미지는 음습하고 어둡다. 축축한 지렁이와 대야를 가득 채운 개구리 알, 유리병에 갇힌 개미들, 길에서 주운 죽은 고양이, 식탁 위에 올려놓은 쥐며느리, 깨진 채집통 속의 잠자리들이 등장한다. 거부하고 싶은 강렬한 이미지가 무의식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징들을 통해 이어지는 시 「쌍둥이」에서도 숨겨진 자아의 반쪽을 찾아 헤맨다. 울음을 그치지 않고 배불리 먹고도 웃지 않는, 작은 글자로 대변되는 ‘나’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어두운 그늘 속 자신의 내밀함을 세상 밖으로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적 세계를 구원하는 길은 무엇일까. 시인은 신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한 명의 순례자를 구원의 대리자로 선택한다. 아주 먼 옛날부터 쉬지 않고 걸어온 순례자가 마침내 신전을 완성하고 평생 동안 간직한 목소리를 내었을 때 신도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끝나지 않을 그의 말을 들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시인이 염원하는 순례자는 「세카이계 만화」에서 온몸이 박살난 채 내장과 뼈를 질질 흘리며 세계를 위한 싸움을 이어가는 여자애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화자는 여자애를 향해 다치지 말라고 제발 너를 위해서 살라고 부르짖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보일러실에서 들리는 낡은 기계 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어쩌면 헤게모니 속 희생양의 정체를 간파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시적 비유로, 때로는 꿈으로 대변하는 시인만의 솔직한 감정으로 변혜지 시인은 시집 전반에 자신만의 견고한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가 그려놓은 가상 세계에서 독자는 깊게 생각하고 충분히 음미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시적 사유들을 맛볼 수 있다. 이 21세기 묵시록의 다음 편이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절대 멸망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변혜지
이 시는 눈동자에 남반구 식물을 심게 된 경위를 다루고 있다. 나는 내가 깨달은 것을 기록하기 위해 앉아 있었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자 사람들은 큐 사인을 받은 배우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창문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흰 봉투를 쥐여주고 싶은 나를 도로 한 켠에 넣어두었다. 모든 게 끝나버렸어. 그렇게 말하면 날이 밝는다. 가자. 전부 버리고 떠나버리자. 침통하게 말하던 사람이 직장에서 돌아와 배달 음식을 고르고 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손바닥에 쥐고 있어. 절대로 끝나지 않을 사랑을 가지고 있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생각이 시작되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 켠의 내가 끝나지 않을 여행을 떠난다. 손바닥 속의 유리구슬을 창문 밖으로 던지고 한 켠의 내가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다. 걔네는 생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나의 몽상은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는다. 주문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또 한 사람의 내가 이 방의 모든 것을 리어카에 쓸어 담는다. 뭐라도 팔아보려고, 아무리 많이 팔아도 내가 너덜너덜해지지 않는 것이 부끄러웠다. 풍요는 불행이 지닌 특징이었다. 여기까지 쓰고. 한 켠의 내가 팔짱을 낀 채 이다음에 팔 수 있는 문장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남반구 식물을 눈동자에 심게 된 경위를 다루고 있으므로 어떠한 마음가짐과 결심이 나를 이끌었는지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게 예의 바른 행동이니까. 그러면 한 켠의 내가 성급히 대답할 것이다. 분재는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눈동자 속의 나무를 가꾸는 일이 어렵지는 않아요. 눈을 감고 지켜보기만 하면 되니까요. 이 고요한 파수把守의 행위는 사랑이 아니지만 사랑 같았다. 이것은 창문 안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 지성사, 2023.
----------------
세카이계 만화
변혜지
다행이야, 정말
네가 아니라 나라서
온몸이 박살난 채 나와 동갑인 여자애가 웃고 있다. 내장과 뼈를 질질 흘리며 그 애는 세계를 위한 싸움을 이어나간다. 저 여자애는 세계로부터 무엇도 받지 못했다.
전부 내 잘못이야. 그 애에게 힘을 준 것은 내 잘못이야. 나는 몰랐어. 이럴 줄 몰랐어…… 여자애의 아버지는 여자애의 이름을 부르며 마구 울어젖힌다. 모르는 사람들이 잘못한 사람을 껴안고 있다. 모두가 나와 동갑인 여자애를 쳐다보았고
이렇게 많은 장면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여자애의 내장은 쏟아지고 있다. 초능력을 쓸 줄 아는 손들이 움직이고 있다
다치지 마. 이제 제발 너를 위해서 살아. 만화책 속의 여자애에게 들려주려고 나는 고함을 지른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이 더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있다.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하려 했고
으으응…… 으으응……
보일러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그러지 말라고 나를 달랬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 지성사, 2023.
--------------
언더독
변혜지
이 세계를 네가 구했어.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린다. 폐허가 된 도시에 둘러싸여서, 꿈속의 나는 아름다웠다. 나의 아름다움이 나의 의지와 무관하였다.
눈을 빼앗길 만한 장면이어서 나는 이 세계와 어울리는 음악을 마련하였다.
화관花棺 속에 두 손을 가슴에 모은 내가 누워 있었고, 살아남은 모든 이들의 행렬로 거리가 잠시 가득 찼다.
나는 어떻게 이 세계를 구했나. 나의 궁금증이 이 세계와 무관하였다.
연인이 내게 입을 맞추며 엄숙하게 사랑을 맹세하였고,
잠들었던 관객이 영화의 결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듯이, 나는 영문 모를 격정에 휩싸였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내가 꿈속의 나를 향해 소리치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일제히 나는 노려보았다.
나는 행렬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의 격정이 나와 무관하였고, 화관에 누운 내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비로소 이 꿈의 구성 방식을 알 것 같았고,
나는 이 세계에 두고 나가야 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 지성사, 2023.
-------------
팩맨
변혜지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그는 분주한 신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라는 신탁을 받고 길을 떠납니다. 집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자유로운 새와 같고
신이 언제라도 손을 뻗어 그를 쥘 수 있도록
아름다운 둥지를 원합니다
그의 봇짐을 짊어지려고, 나귀 한 마리는 그의 순례를 기꺼이 뒤따릅니다. 그가 언제까지나 걸을 수 있도록 바람이 뒤따릅니다. 그를 추월하지 않으려고 주춤거리던 어둠이 엎질러질 때까지.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그는 작은 사람들의 마을에 도착합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려다가 몇 사람을 밟고 맙니다. 놀란 나귀가 잠시 날뜁니다. 손가락 사이의 잠자리처럼.
사람들이 달아납니다. 날개가 찢기는 것도 모르고 작은 사람들은 영영 작은 사람들이 됩니다. 그는 상심한 채로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그는 커다란 입을 가진 사람들의 마을에 도착합니다. 음식을 넣고, 웃느라 사람들은 분주해 보여요. 그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눈을 그려줍니다. 둥근 두 개의 귀를 달아줍니다. 서로의 얼굴을 처음 본 사람들이 비명을 지릅니다. 눈을 감은 채 귀를 막고 울기 시작합니다. 그는 크게 상심한 채 길을 떠납니다.
순례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허리가 굽습니다. 머리색이 희어집니다. 그러나 마지막 인사를 건넨 나귀가 풀썩 쓰러지고 바람과 어둠과 모든 나무들이 그를 잊어도 그는 걷고 또 걸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온통 새하얀 벌판에 도착했을 때 그는 드디어 멈추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비로소 신전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눈으로 만든 신전이었습니다.
아주 먼 옛날의 일입니다.
신전이 마침내 완성됐을 때 그는 너무 늙어버려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귀도 들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평생을 간직해온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신전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신이
그의 경건한 말씀을 듣고, 또 들어도
그의 말씀은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 지성사, 2023.
변혜지 시인의 첫 시집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문학과 지성사에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11년 만에 신작 시집 『하염없이 하염없는』으로 돌아온 강연호 시인 (1) | 2024.01.15 |
---|---|
김경성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모란의 저녁』 시인동네 시인선으로 발간 (2) | 2024.01.15 |
2017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데뷔한 서유 시인의 첫 시집 『부당당 부당시』, 시인의 일요일에서 발간 (1) | 2024.01.05 |
2015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데뷔한 김태우 시인의 첫 시집 『동명이인』, 걷는사람 시인선으로 출간 (1) | 2024.01.05 |
임성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바늘이 쏟아진다』 시인동네시인선으로 발간 (3) | 2024.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