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 대표시>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김왕노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르고 떠난 후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누군가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때로는 위험한가를 알지만
자작나무나 풀꽃으로 부르기 위해
제 영혼의 입술을 가다듬고
셀 수 없이 익혔을 아름다운 발성법
누구나 애절하게 한 사람을 그 무엇이라 부르고 싶거나 부르지만
한 사람은 부르는 소리 전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흘러가거나
부르며 찾던 사람은 세상 건너편에 서 있기도 하다
우리가 서로를 그 무엇이라 불러준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 무엇이 되어 어둑한 골목이나 전쟁터에서라도
환한 외등이나 꽃으로 밤새 타오르며 기다리자
새벽이 오는 발소리라도 그렇게 기다리자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불러주었듯
너를 별이라 불러주었을 때 캄캄한 자작나무숲 위로
네가 별로 떠올라 휘날리면 나만의 별이라 고집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자작나무라 부를 때 난 자작나무가 되었다
― 《문학과사람》, 201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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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꽃이라 부르고 열흘을 울었다.
김왕노
비 추적추적 내리는 날 화무십일홍이란 말 앞에서 울었다.
너를 그 무엇이라 부르면 그 무엇이 된다기에
너를 꽃이라 불렀으니 십장생 해 , 산 , 물 , 돌 , 구름 , 소나무 , 불로초
거북 , 학 , 사슴 중에 학이거나 사슴으로 불러야 했는데
나 화무십일홍이란 말을 몰라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나 십장생을 몰라 목소리를 가다듬었으나 꽃이라 불렀기에 울었다.
단명의 꽃으로 불렀기에 내 단명할 사랑을 예감해 울었다.
사랑이라면 가볍더라도 구름 정도로 오래 흘러가야 하는데
세상에나 겨우 십일이라니 십일 동안 꽃일 너를 사랑해야 한다니
그 십일을 위해 너를 꽃이라 불렀기에 너는 내게 와 꽃이 되다니
꽃에 취하다 보니 꽃그늘을 보지 못했다니 너를 꽃이라 부르고
핏빛 꽃잎 같은 입술로 울 수밖에 없었다 .
세상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에메랄드 진주 비취 사파이어 마노
자수정 , 남옥 , 사금석 , 혈석 , 카넬리안 , 공작석 , 오팔 , 장미석
루비도 있는데 너를 때 되면 시드는 꽃이라 부르고 울었다.
지는 꽃보다 더 흐느끼고 이별의 사람보다 더 깊고 길게 울었다.
―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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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김왕노
애초부터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 이건 처녀에게 폭력적인 것일까, 언어폭력
일까. 내가 알던 처녀는 모두 아줌마로 갔다. 처녀가 알던 남자도 다 아저씨로
갔다. 하이힐 위에서 곡예 하듯 가는 처녀도 아줌마라는 당당한 미래를 가졌
다. 퍼질러 앉아 밥을 먹어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아저씨를 재산목록에 넣고
다니는 아줌마, 곰탕을 보신탕을 끓여주고 보채는 아줌마, 뭔가 아는 아줌마,
경제권을 손에 넣은 아줌마, 멀리서 봐도 겁이 나는 아줌마, 이제 아줌마는 권
력의 상징, 그 안에서 사육되는 남자의 나날은 즐겁다고 비명을 질러야 한다.
비상금을 숨기다가 들켜야 한다. 피어싱을 했던 날을 접고 남자는 아줌마에게
로 집결된다. 아줌마가 주는 얼차려를 받는다. 아줌마는 처녀의 미래란 말은
지독히 아름답고 권위적이다. 어쨌거나 아줌마는 세상 모든 처녀들의 미래, 퍼
스트레이디
― 《리토피아》,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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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김왕노
유모차에 유머처럼 늙은 개를 모시고
할머니가 백년 복사꽃 나무 아래로 간다.
바람이 불자 백년을 기념해 팡파레를 울리듯
공중에 솟구쳤다가 분분이 휘날리는 복사 꽃잎, 꽃잎
백년 복사꽃나무 아래로 가는 할머니의 미소가
신라의 수막새에 그려진 천년의 미소라
유모차에 유머처럼 앉은 늙은 개의 미소도 천년 미소라
백년 복사꽃나무 아래 천년 미소가 복사꽃처럼 피어나 간다.
그리운 쪽으로 한 발 두 발 천년이 간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할머니 앞에
지퍼가 열리듯이 봄 길 환히 열리고 있다.
― 『복사꽃 아래로 가는 천년』, 천년의시작,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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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스식 사랑
김왕노
내 말이란 저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그대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섬입니다.
당신은 섬의 어법도 모르고 내 어법도 모르고 나도 당신의 어법을 모릅니다.
당신의 주소도 모릅니다. 내 마음도 저 바다 위에 뚝뚝 지는 동백 꽃잎 같은 것입니다.
당신은 동백의 어법도 모르고 동백 꽃잎을 싣고 먼 당신을 찾아갈 물결의 어법도 모릅니다. 동백 꽃잎을 대하고 속삭일 당신의 어법을 나도 모릅니다. 하나 당신의 어법에 익숙해질 때까지 나는 저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입니다.
수없이 몰아쳐 오는 태풍에 동백 꽃잎 같은 그리움만 뚝뚝 떨어뜨리며 내 어법에 당신이 익숙해질 때까지 저물지 않는 섬입니다.
비록 내가 당신을 향해 가진 사랑이란 들쑥날쑥한 리아스식 사랑이지만 우리의 모국어, 사랑의 어법에 우리의 입술이 물들 때까지 난 점점이 떠 있는 섬입니다.
― 《시안》, 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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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대표 디카시>
참회
되돌아서서 울지 마라! 네 울음 비수처럼
내 늑골 틈으로 파고든다.
네 보다 더 많은 죄의 나도
네 앞에 이렇게 떳떳이 서 있지를 않느냐.
― 『게릴라』, 디카시,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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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폭력
히치콕의 새를 본 기억
까마귀가 불씨처럼 살리는 저녁
밤에 창문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까마귀
그러나 반가워 폰에 담을 수밖에 없다.
― 『기억의 폭력』, 시인광장출판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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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벌써 촉수가 되어
바람을 감지하며
긴장하는 이파리
그대가 태풍으로
내게 불어오기를
― 『기억의 폭력』, 시인광장출판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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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사랑
이루지 못할 그리움이여
닿지 못하는 인연이여
날개짓 손짓으로만 남은
아련한 사랑의 아픔이여
― 『독작』, 실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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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오오
상처의 힘으로 침묵으로 부르지만
귀를 우주 끝까지 열어주는 노래
아아, 오오 환희에 찬 생명의 노래
― 『독작』, 실천, 2023.
웹진 〈시인광장〉발행인을 맡게 된 김왕노 시인을 통해 알아본 웹진의 미래2 < 스페셜 집중조명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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