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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시in〉 스페셜 집중 조명 _ 김해자 시인편1

스페셜 집중조명

by 미디어시인 2024. 3. 8.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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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곁에서 먹고 자고 숨 쉬는 시들, 끝내 우리는 이를 악물고 희망하는 법을 배운다

 

인터뷰 진행: 이정은 시인

 

 

한국 민중시의 도도한 물줄기를 이어가는 동시에 만해문학상, 백석문학상 등 권위 있는 문학상을 잇달아 수상하며 문학성을 입증받은 김해자 시인이 여섯 번째 시집 니들의 시간(창비, 2023)2023년 말에 출간했다. 등단 이후 줄곧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곁에서 목소리를 함께 내온 김해자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온몸으로 쓰는 리얼리즘의 시 세계를 한층 벼려내 인간과 비인간을 넘나들며 삶과 세계의 비극을 증언”(안희연, 추천사)한다.

 

구상문학상 수상작 해자네 점집(걷는사람 2018) 이후 5, 암 투병 중의 생()체험과 사회적 죽음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소시집 해피랜드(아시아 2020)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은 시대의 고통과 슬픔을 관통하는 역사 인식과 폭력과 탐욕으로 얼룩진 야만적 현실을 직시하는 냉철한 시선으로 가득하다.

 

이 시집의 매력은 그뿐만이 아니다. 삶의 구체적인 경험에서 길어 올린 진정성 있는 시편들이 무겁고 아프게 다가오는 한편, 시인은 곳곳에 익살스러운 유머를 배치해놓았다.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웃음을 찾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바 니들의 시간은 그야말로 민중과 발걸음 그리고 눈높이를 맞추는 시집이다. “두 눈을 뜨고 읽어야 하는”(송종원, 해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곱씹고 주위의 삶을 둘러보게 되며, 이윽고 벼랑 끝 같은 현실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희망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일찍이 한 시인이 가난한 영혼이 고통을 받는 모든 곳에 김해자의 시가 있다”(문동만, 축제추천사)라고 말했듯이 김해자의 시는 쓸쓸하고 외롭고 가녀린 영혼들을 향한 끝없는 사랑의 노래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정의롭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얼굴”(해설)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발 디딜 땅 한뼘 없허공마저 비싸서/숨 쉴 만큼의 공기도 허락되지 않”(감긴 눈꺼풀 곁에서)는 자본의 땅을 떠나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늘 희푸른 말”(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이 살아 숨 쉬는 마을로 내려온 지 벌써 십오 년째, 시인은 희망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 같은 마음”(어마어마한 도시락)을 다독이며 살자 살아보자”(양미숙의 철화분청사기) 다짐한다.

 

김해자의 시는 현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자리에서 탄생한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개인과 시대의 기억을 더듬으며 시간여행을 떠난다(시간 여행연작). 이 연작은 역사의 아픔을 격정적인 목소리로 토해내기보다는 차지고 구성진 사투리를 통해 그날의 마음들을 해학적으로 풀어놓는다. 물론 가볍지만은 않다. 전쟁 당시 양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된 장소에서 탄피 박힌 두개골불에 탄 뼈”(수철리 산 174-1번지)가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는 침묵의 소리를 듣기도 하고, “비명을 깨물다 돌처럼 굳어간 아무개들의 관짝 같은 백비(白碑)”(비명 곁에서 비명도 없이)를 돌아보며 한국 현대사의 그늘진 이면과 암흑의 시대를 살아온 민중의 삶을 간곡한 언어로 되살려내기도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시인의 관심은 후쿠시마 원전수 방류(내 이름은 아르카)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달이 내 창문을 서성이고 있다)으로 이어지는바 십년 삼십년 육십년 백년 후에 올”(삼십년 후, 소년 소녀에게) 세대에게 우리가 어떤 세상을 물려줘야 할지를 독자로 하여금 곰곰 생각해보게 하는 작품을 창작했다.

 

 

 

<미디어 시in>에서는 스페셜 집중조명으로 김해자 시인과 인터뷰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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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집 니들의 시간이 출간되었습니다. 이번 시집을 선보이는 마음이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기존에 출간된 시집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답변: 시도 촌스러워지고 시에 먹을 것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요. (<언니들과의 저녁식사>라든가 <이웃들> <월식> 등등) 10년째 여기 살면서 자연물과 동네 어른들과의 관계 혹은 말이 시에 등장하게 된 것도 같아요. 그전엔 이웃이라는 실감 혹은 화두가 딱히 없었는데. 어느날부터 고유명사가 등장하더군요. 그리고 농사를 지으니까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시에 동사가 제법 추가되구요. 내가 날마다 보는 새라든가 부추나 파, 깻잎 같은 작물들이라든가 하는 자연물이나 달 같은 것도 이야기와 정서에 묻어들어와 저절로 엮이는 것 같아요.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해자네 점집), <푸른 혀들>, <물호스가 달빛 속으로>(니들의 시간) ) , 입말도 제법 구사하게 되었네요. 시가 현장감과 생동감을 지니게 하려고요.

최근 2년여 급격한 민주주의의 후퇴와 코미디 같은 정치와 추락하는 민생 등을 지켜보면서 많이 돌아보게 되었어요. 동학혁명과 12.12사태에 이은 서울의 봄과 1987년 민주화 항쟁 등이 겹쳐서 지나가더군요. 희망이 없다 싶으니 저절로 곱씹게 되더군요. 그래서 처교죄인동학괴수로 처형당한 해월 선생이나 녹두밭의 새들이 현재의 노동자 농민들의 삶과 포개지더군요. 시간과 공간을 분리할 수 없듯이 어떤 기억을 떠올리면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떠오르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누군가가 움직이고 교섭하고 사건을 만들고 감정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최근엔 전혀 다른 시간대와 장소에서 과거가 소환되어 지금 이곳과 겹쳐지면서 재해석되는 거 같네요. 외부나 도시와 차단된 일종의 정적 속에서 시간여행을 하기 시작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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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의 눈, 벌레의 눈이라는 제목의 시평집을 내셨고, 이번 시집에는 <육독(肉讀)>이라는 제목의 시가 실려 있는데, 세상을 보는 시인의 자세랄까 하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어 보입니다.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말들인지 독자들을 위해 설명 부탁드립니다.

 

답변: 저는 위대한 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들 속에 살아 있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고 티나지 않는 존재들이 세상을 떠받치고 우리를 먹여 살린다고요. 저에게 시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나 매. 비행기의 시선처럼 한눈에 조망하는 시선이 아니라 땅속 벌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찮아 보이는 땅속 미물의 눈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이 혼돈의 시대에 글을 읽고 쓰는 자가 지켜야 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해왔어요.

그런 의미에서 육독(肉讀)이 연결될 것 같습니다. 시집 위에서 다리로 묵독을 하는 아주 작은 벌레처럼 나도 몸으로 세상을 배워야 한다는 자각이랄까요. 호미와 낫이 콩밭과 고추밭과 풀밭에서 땅에 몸을 대듯이, 학문이란 학교와 책이라기보다 몸으로 읽어내려간 기록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흙의 어원이 humus, 겸손이라고 하던데, 시는 개념이나 이론보다 잘린 나뭇가지에서 나오는 육즙 같은 육체적 형상에 가깝다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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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인께선 건강을 위해서 시골살이 택하신 건 아닌가 싶습니다. 거기서 만난 땅과 농사, 그리고 이웃 사람들의 삶 덕분에 시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근황과 더불어 시인에게 찾아온 변화의 양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변: 산골 살면서 먹고 사는 것과 우리를 먹여살리는 농작물과 풀과 이웃들의 속이야기가 실감나게 다가오게 되었어요. , 인간 별거 아니다. 지렁이나 문득 어느날 고개 내미는 달맞이꽃이나 나나 별반 다를 거 없다는 생각도 들고요. 해와 달이 날마다 내 앞에 부려놓은 시간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되었다고나 할까. 천둥 번개 치면 마룻장 밑에 들어가 꼼짝도 않고 엎드려 있는 강아지처럼 말이죠.

이웃들과 산과 밭 덕분에, 이 모든 보이는 안 보이는 존재들 덕분에 많이 건강해졌어요. 웃음도 많아지고요. 웃음 총량의 법칙 같은 게 있는 거 같아요. 어쩌면 내 인생도 웃기고 지구라는 행성도 웃겨요. 이게 말이 돼?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간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 같아요. 웃음은 그 비극성에 비례하고요. 자주 심각해지고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절망이 너무 크니까 살려고 저절로 균형을 잡는 것도 같아요. 심각함이 진지함을 넘어 일정 이상 수위가 올라가면 몸이 알아서 슬슬 재미난 언어 상황을 빚어내는 사람들을 찾는달까. 고달픈 중에 위무하고 싶은 거랄까. 사실 저는 비관주의자예요. 세상에 큰 기대도 없고 세상이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고 느끼죠. 무의식적으로요. 그래서 더더욱 작은 것에서 단초에서 희망이라는 날개를 잡으려 하는지도 모르죠.

농촌과 소멸되어 가는 농민의 현실을 아프게 표현하는 작품도 등장하게 된 거 같아요. <푸른 혀들>, <물호스가 달빛 속으로>< 훔쳐보다> 등등. 하지만 우연찮게도 <니들의 시간> 첫머리에 놓인 시 제목이 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입니다. 나보다 고생고생하고 살았지만 심상하게 웃긴 이야기를 전하는 할매언니들을 보면서 인생을 다시 배우는 기분입니다. 원래부터 명랑하고 잘 웃는 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잃어버린 웃음과 해학을 회복하게 된 것도 같고요. 제 시에서 심각한 것만 보지 마시고 농담과 웃음도 봐주셨으면 해요. 퐁당퐁당 희비극을 건너뛰면서 개울을 건너가듯이요. 그게 아무리 생존형의 웃음이라고 해도. 우리 대부분의 민초들은 그렇게 살고 버텨내고 견디고 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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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그동안 줄곧 슬픔과 고통이 자리하는 낮은 곳을 응시하는 시를 써오셨고, 나아가 우리 안의 슬픔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참화에 대해 아파하는 목소리를 내오셨는데요, 세계의 비참과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한데, 이런 상황에서 시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답변: <팔레스타인을 잇는 다리>라는 모임을 주도한 오수연 작가와 평화 활동가들과 팔레스타인은 제가 직접 다녀온 장소이고, 난민촌에 가서 그 동네 분들한테 접대를 받기도 했죠. 팔레스타인 폭격이 계속된 작년 가을에 파주문학축전에서 <사소한 일>이라는 소설로 맨부커 상 후보에 오른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를 만났는데 차마 팔레스타인의 팔 자도 발음하지 못했어요. 함께 자고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경계에 있는 수없이 많은 장소를 함께 다녔으니까.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여러 번 만났으니까.

안희연 시인이 <니들의 시간> 추천사에 한 손에는 현미경을, 한 손에는 망원경을 들고 세상의 병든 부위만 골라보겠노라 작정한 사람 같다.”라고 써줬는데, 그거 보고 많이 웃었어요. 작정은 안 했는데 예민한 분들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그런 해석을 전적으로 수용하기는 해요. 내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자꾸 죽은 사람들이 지나가니까. 귀신처럼 내 귀에 속삭이고 꿈에도 나타나고. 그래서 내 시가 고문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런데 사실 제가 자주 웃고 친구 따라 강남 가고, 무릎 썩는지 모르고 친구들과 잘 노는 명랑한 성격인데, 어쩌다 그 지경으로 보이게 됐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어쩌겠어요. 심장이 반응할 때 시가 써지는 걸. 심장 곁에 귀가 달린 것처럼, 가슴이 팔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아무래도 직접 만난 사람이거나 그 장소에 가 본 경우에 가슴이 반응하잖아요. 시가 휙 지나가도 심리적 거리가 너무 멀거나 너무 가까우면 못 쓰죠. 써도 발표하지 못하고요. 다른 시인들도 아마 그럴 거 같아요. 시가 탄생하게 하는 어떤 적정거리가 있는 거 같아요. 시로서, 희망을 간절히 떠올리려고 노력해요. 공동선을 향한 보시 중 하나가 시라고 믿어요. 읽는 사람이 적어도 시로 발화하는 순간 공기를 바꾸는 일이죠. 인류와 모든 생명체들에게 보내는 편지이자 공중에 쓴 수화입니다 시는. 희망을 간절히 떠올리는 사람은 다급하고 절박한 사람들일 겁니다. 어쩌면 비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지워진 존재들이죠. 그러니 악을 쓰는 겁니다. 악쓰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니까요. 억울하게 죽어서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이죠. 그러니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이를 악물고라도 지푸라기 같은 희망 한 조각을 붙잡는 거 아니겠나 생각해요. 저는 이 세계에 대해 갈수록 더 절망하는 사람입니다. 사실 비관주의자입니다. 비관 속에서도 뭔가를 하게 하는 것은 역시 사람이죠. 나보다 더 아프고 억울한 사람들을 보며 뭔가를 하게 되지요. 꺾이지 않을 결심도 나오게 되죠. 따먹힌 복숭아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잘린 가지 입장에서 보는 것, 그럼에도 잘린 끝에서 붉은 잎이 나오는 걸 보는 것, 그게 시가 가진 한 조각 희망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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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인의 시 쓰기에 자극과 영향을 준분이 많겠지만 김종철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에도 추모시가 한 편 실려 있고요, 김종철 선생님과 <녹색평론>에 얽힌 사연이나 배움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답변: 지면을 통해서나 강연 때 몇 번 뵙기는 했지만 마음이 짠하고 통한 것은 세월호 추모제 때에요. 환히 웃으시면서 제가 낭송한 글을 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그 다음호에 여는 글로 <녹색평론>에 싣으셨지요. 이철수 화백 그림까지 넣어서. 선생님 만나고 제 인생이 확 바뀌었지요. 격월로 나온 녹색평론처럼 격월로 김밥 모임에서 선생님을 수차례 뵈었어요. “세계가 망가져가는 것을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다.”라고 하셨던 실천적인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지성이셨지요.

김종철 선생님은 신문에 쓰는 잡문을 귀하게 여겼어요. 현재형의 발언 말입니다. 순수하게 시만 쓴다고 폼 잡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리 시대의 고민을 잡글로 내놓으라고 하셨어요. 문필가를 아주 귀하게 여겼지요. 민주정부가 들어섰을 때 원고료는 정상 수준으로 해줘야 한다고 그 분야의 어떤 분에게 간곡히 건의했다는 말도 전해들었죠. 세상이 바뀌겠냐며 다소 냉소적이고 절망에 이른 즈음 뵙게 되었는데 희망을 만났지요. 미래 같은 건 없다. 오직 희망이 있을 뿐이다. 제가 지닌 병조차 받아들이게 됐어요. 아주 큰 마음이죠. 진짜 시인의 마음. 소수민족의 웅얼거리는 야생언어가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것도 선생님이죠.

선생님 만나면서 그전까지 막연히 따로따로 존재했던 고민과 문제의식이 통합되었다고 할까요. 불평등의 문제, 노동과 농민 그리고 생태계와 민주주의가 실물과 일상의 삶으로 육박해 들어오는 게 심장으로 전해졌죠. 외국 어느 나라 철학자와 사회이론가보다 치열하고 수준 높고 디테일한 사유와 언어를 느끼며 뒤늦게 김종철 선생의 제자가 된 셈이네요. 선생님이 가시고 일년만에 다시 <녹색평론>이 나오고 있는데,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와 큰 차이가 없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어요. 한 사람이 살다 간 자리가 그만큼 큰 것이구나, 새삼 감탄하며 주저앉은 무릎을 다시 세우게 됩니다.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 과연 남의 일인가 자주 생각해요. 김종철 선생님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아주 민감한 분이셨어요. 당신이 듣고 경험하는 것이 안으로 들어가 밖으로 이어지는 거울이 된다는 느낌이랄까. 나와 타인과 세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그분을 저는 시인이자 혁명가이자 영성 깊은 철학자라고 봅니다. 온누리의 생명과 인류의 개벽을 참으로 오랫동안 소망하신. 제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현재형의 거울처럼 시를 대한 것처럼, 김종철 선생님의 글을 읽다보면 바로 제 옆에서 해주는 말처럼 느껴져요. 김종철 선생님 말과 글이 광야의 예언자의 외침처럼 느껴지는 건 아마 세계와 같은 리듬으로 맥박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차의 백미러에 써있는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셨다는 거죠. 그러니 숱하게 죽어가며 아우성치는 생명들이 이명으로 들려왔던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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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집을 펴낸 뒤에 허탈감 같은 게 찾아오기도 한다고 하던데요, 그러한 굴곡은 어떻게 넘어오셨는지요. 개인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지만, 첫 시집을 내고 슬럼프라고 할까요? 시에 대한 고민을 하는 시인이 있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시겠어요?

 

답변: 가까운 선배가 그래요. 시집 보내는 게 시집 내는 것보다 힘들다고. 우리끼리 품앗이인데 누구는 보내고 누구는 안 보내고 그게 참 미안할 때가 있다고. 그렇게 심각하게 시를 쓰고 보내도 돈도 안 되고 하니까 좀 널널하고 재밌고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글은 없을까? 안 팔리는 시집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긴 하죠. 뭐하려고 이 골아픈 시를 쓰고 있나부끄러움을 빨리 잊으려고 다음 시집을 빨리 준비한다는 재밌는 얘기를 들었어요.

시집 내고 허탈한 게 대부분이지요. 한 줌도 안 되는 명망가나 대중적 인지도 높은 시인 몇 빼고는 다 그럴 거예요. 그래서 시집 부치면서도 이게 뭐냐 싶지요. 잠시 시무룩하더라도 다음에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세요. 시무룩과 허탈을 벗 삼아 그 공백에 다음 시를 받아쓰세요. 그래야 다음 아이가 태어나죠.

<집에 가자>를 세월호 직후에 냈는데, 이상하죠. 아무것도 바뀐 게 없어요. 더 나빠지고 있어요. 기후위기도 생태계의 절멸도 약자들이 묽어져 점처럼 지워지는 속도로, 위험하기 짝이없는 인류사도 세계도 더 위험한 쪽으로 가속도가 붙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종이거울인 시를 포기하지 말자 얘기하고 싶어요.

나와 타자를 점선으로 이어 한목숨으로 여겨지게 하는 시는 종이거울인 것 같아요. 그러니 안 팔려도 안 알아줘도 이 거울을 버리면 안 되겠지요. 팔레스타인이 폭격당하고 있을 때 저는 라는 종이거울 속에서 나는 맞아죽은 자이자 때려눕힌 자이고 독재자이자 야만적인 인류사라고 다시 한번 느꼈어요. 내 탓이 아닐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가 이것을 듣고 보는 자라면, 직접이든 간접이든 경험하고 있다면, 이 사건은 나와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책임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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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지막으로, 니들의 시간을 감상할 독자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답변: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한시에 목숨을 잃고 우크라이나에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 쓴 시들이라 심정이 아주 복합적이고 더듬거리고 언어가 토막나는 부분도 많아요. 암수술에 이어 찾아온 코로나로 불안과 자율신경 실조라는 증상이 찾아오기도 했으니까요.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치는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를 앓고 있는 시점이죠. 전쟁과 불안과 절망에 시달리는 내 존재조건과 사회적 타살이 여러 겹으로 겹쳐졌어요.

때로 시가 다큐보다 못할 때가 있다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죠. 시가 현실을 못 따라간다는 느낌. 참상과 아픔을 배제하는 게 시라는 느낌이 될 때 부끄럽죠. 먼 나라의 뉴스나 기사가 제게 시를 쓰게 하는 경우도 있죠. 우크라이나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로켓포가 떨어져 아이들과 여자들이 많이 다치고 죽기도 했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그 포탄에 크게 써 있는 흰 글씨를 보니 러시아어로 어린이를 위해서라고 돼 있더군요.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지금도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전쟁으로 차별로 증오로 혐오로. 전쟁은 사회적 죽임의 첨단이지만,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 사람, 자살자 등도 모두 사회적 타살이라고 저는 봐요. 누구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면 생명체는 정말 스스로 제 목숨을 일부러 끊지 않는다고 저는 느끼니까요.

니들이 뭔데?” “니가 뭔데?” 하는, 조롱과 차별의 언어가 판치는 세상에서, 생명을 죽이는 니들이 판치는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강자와 약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내국인과 외국인, 인간과 비인간을 편가르기 하는 혐오와 증오의 세상에서 그와 다른 우리가 되는 니를 꿈꿨어요. 과거 현재 미래가 이곳에 함께 하는 현장으로서, 우데게족이 지칭하는 동물 사람 귀신 차별 않고 라고 부르는 세상을. 우리가 이렇게 계속 살면 미래에 오는 들은,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은 어찌 살까요? 우리가 먹어치워 버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현재의 니들이 미래의 니들. 저는 이론 같은 것은 몰랐는데, 고영직 선생이 이런 식의 세상을 식인자본주의라고 하더군요. 다소 불편하고 힘들어도 이런 생각과 마음을 공유했으면 소망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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