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선 대표시와 시인이 직접 쓴 시에 대한 소견>
월식
김해자
달이 진짜 안 뵈네
뭔 일로 멀쩡하던 보름달이 갑재기 안 보인댜
사람만 그런 게 아녀
해도 달도 사연이 많어
자식 놓쳐불고 죽을라고 밤에 강으로 갔는디 컴컴항 게 암것도 뵈지 않으니께 여가 거근지 거가 여근지 모르겄더라고. 일단은 들어갔어. 근디 허리까지 차니께 몸이 붕 뜨더라고. 막 뜨니께 으디를 붙잡을 디도 읎구, 죽으러 드갔는디 죽어야 하는 건지 살아야 되는 건지, 이 꼴로 으디를 가나 내 맘만 젖었다니께.
그 훤하던 게 으디 처박힜나
물에 빠졌으까 산에 맥혔으까
달이 한창씩이나 안 나오네
그래도 뭐 다 가리진 못하고 둥그런 테두리가 보이는디
아주 죽은 게 아녀
물은 안 되것고 눈 감고 뛰어내리믄 괜찮을 거 같어 저짝에 옥상 꼭대기로 허리 붙잡고 올라가는디 죽을 맛이더라고. 이제 죽으나 저제 죽으나 죽을라고 올라가는디, 허리가 아파 죽겄어. 나는 모르것지만 흉한 꼴 볼 사람들 떠올리니께, 도저히 못 뛰어내리겄데.
별이 저리 많아도 달 하나 못 구하나
별이 아무리 여럿이 박혔어도 달 하나만 못 혀
하이고야, 저 하늘 좀 봐 목화송이마냥 훤혀
물에 처박혔다 꽃이 되었구마
저승길 밟은 맴으로 살아보자, 어디까정 갈지 모르겄지만 살다보믄 무슨 수가 있겄지. 그냥 살기로 혔어. 아프다 아프다 해도 죽게 아프지는 않으니께 살아야지. 나 죽네 나 죽네 하믄서도 세상은 돌아가잖여.
야아 달이 살아났네
저기 좀 봐 달이 나오잖여
나 달이다, 허고 일어났잖여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소견>
나는 내가 될 뻔한 존재들, ‘시 안 쓰는 시인들’의 언어를 받아쓰는 시인이다. 글자를 몰라도 책 같은 것 안 읽어도 이미 시인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 시는 우리동네 맹대열(84) 언니의 이야기와 말을 받아쓰고 그 이야기를 토대로 쓴 시입니다. 희망과 웃음을 잃지 말고 살아보자고. 죽을 만치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헌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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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의 시간
김해자
1
연해주 사는 우데게족은
사람 동물 귀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니’라 부른다는군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안에 깃든 모든 영혼을 니로 섬긴대요
삵이 마을을 어슬렁거린다는 소문
밤 창문을 닫으려다 흠칫 놀랐어요
누군가 여태껏 훔쳐보기라도 한 듯
뻣뻣한 털들이 돋아난 유리창은 거대한 눈,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찔릴 것 같았지요
수상쩍은 날들이 이어졌어요
이상스런 생물체가 출몰한다는 소문이 퍼졌죠
봄이 오긴 온 건가요
안전 안내 문자를 받으면 안전해지긴 할까요
이끼 낀 계단이 노려보았어요
맘만 먹으면 어디서든 넘어뜨릴 수 있다는 듯
모서리가 너무 많아요
2
비늘구름 속에서 미사일이 날아다녔어요 인형 속에 인형, 탄두 속에 탄두, 아이 손에서 터지는 탄두 속 작은 집속탄, 밀밭은 보고 있었죠 무너진 담벼락과 흩어진 살점들, 폭격에 쓰러진 나무가 가리키고 있었죠 크라마토르스크 기차역에 떨어진 토치카-U 로켓에 쓰인 흰 글씨, “어린이를 위해서”
겨우내 참았던 씨앗이 버럭 솟구친 것처럼
맥락도 없이 튀어나오는 울화
남몰래 사그라진 화장장의 연기는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아 여기까지 왔을까요
살아도 죽어도 제로가 되는 수치
한낮에도 귀신이 출몰한다는군요 소금을 바가지로 뿌려대다
영구 엄니는 옥수수밭에 서 있는 발 없는 귀신들에게 넙죽 절했다죠
한 잔 받으시오, 고수레,
술 가득 부어 고수레,
삭삭 빌었다죠 손가락 넣고 휘휘 저어
석잔 대접하고야 놓여났다죠
발 붙들고 놓지 않는 산 그림자
3
합체는 멸족당한 자들의 모음,
정수리인 오늘의
뒤를 가리키며 어제를 말하고
앞을 가리키며 내일을 말하던 인디오들처럼
니라 부르면 니가 나처럼 느껴질까요
내가 니를 어떻게 했는데, 없이
니를 부르면 니가 나와 섞일까요
니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없이
나의 반대말들로만 이루어진 니들,
니는 대체 왜 그래, 없이
한 잔 받으시오, 죽은 사람에게 고수레
한 잔 받으시오, 산 사람에게 고수레
한 잔 받으시오, 앞으로 살 사람에게 고수레
4
뜨고 나서야 눈 감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우리는 한 꿰미로 사이좋게 도망가는 사이
불안과 사랑을 두 쪽 내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이
철창 속 달궈진 철판 위에서
번갈아 발을 떼는 개처럼(니들은 사람이 아니야)
니가 할딱거리는 동안 뜨거운 철 상자 속에 갇힌 하청에게
맞불을 놓는 원청처럼(니들도 사람이 아니야)
니가 깎여나가는 동안 허리가 묶인 물고기들처럼
아무리 헤엄쳐가도 헤어지지 못하는 사이(우리는 우리가 아니야)
밤이 내려와도 뜬눈으로 누워있는
니들이 실종되는 사이 빠른 속도로 감염되는
멜랑콜리를 나눠 마시며
우리는 점차 말이 없어지는 사이
5
니들이 부서지고 있습니다 산산이
공들여 X자를 붙였어도 태풍에 깨져버린 창문처럼
창에 비치던 너와 나의 얼굴
우린 어쩌다 먹어치워버렸을까요
앞으로 올 니들을
니들의 시간을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소견>
니들이 내가 될 때까지 나는 종이거울을 바라본다
(이 시는 밖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참화, 안으로는 불안과 울화증을 견디던 때에 내가 해체되고 우리가 갈가리 찢겨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마음의 소리를 밖의 형상과 연결시킨 시입니다. 토막토막 나오는 속말을 받아 쓴 시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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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뛰기펭귄
우리는 이를 악물고 희망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차이나 미에빌
김해자
때가 되었다 가자,
흰 털은 희게 검은 털은 검게 단장하고
곱게 그들을 맞이하러 가자
가는 털마다 방울방울 떨리는 목소리
하나뿐인 심장을 알아들으려면 귀 달린 입술이 필요하고
거슬러가기 위해선 오래 걸어야 한다 미래를 낳기 위해선
사막을 건너왔다 바윗덩어리만 한 바다사자 틈 사이
돌고 돌아 왔다
뜨거운 것은 뜨겁게 맞이하고
단단한 것은 단단하게 맞서자
기껏 올라온 절벽, 파도에 휩쓸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눈보라가 앞을 가린다 기어서 가자 폭풍 뚫고 가자
배로 밀고 가자
우리의 발톱이 아이젠이고 앞날개가 팔이다
부리를 도끼 삼아 점프하며 올라가자
두 손 공손히 붙이고 가자
어머니는 얼마나 씩씩하신가
떨어져도 으깨지지 않는 배를 주셨으니
우리들의 느린 아버지는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미끄러져도 발딱 일어서는 불룩한 영혼을 물려주셨으니
뾰족한 창들이 몰려온다 셀 수가 없구나 건너편에서
날아오는 부비새 부리여 빨리 가자 뒤뚱거리며 가자
크레바스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다시는 이어붙이지 못할
거대한 결루여 돌아갈 수 없다
건너뛰어 가자 저 너머로
얼음 속에서 알을 낳고
허기진 신들은 뒤뚱뒤뚱 바다로 갔다
우리의 짧은 발 위에 동글동글한 내일을 올리고
너와 나의 체온으로 덥히자 곡선을 그리며 이 밤을 견디자
낮이 폭풍우를 데리고 왔다 밤이 폭설과 더불어 왔다
미친개처럼 우리를 물어뜯고 있다
내가 밖에서 돌 테니 너는 안으로 들어가라
원은 떨어진 우리의 영혼을 하나로 이어붙이는 것
번갈아가며 몰아치는 폭설을 함께 견디자
벽은 뚫으라고 있는 것이다 뚫기 시작하면 이미 벽이 아니다
하늘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천막을 쪼아라
우리들 머리 위에서 내리누르는
거대한 벽에 빛이 새어들게
구멍을 뚫자 참을성 있게
하나뿐인 부리로
곧 새로운 새벽이 깨어나리라 한 세계가
솜털 보송보송한 너와 나의 미래
차고 넘치는 결여여,
우리는 한밤중에도 들을 것이다
번갈아 언 발 떼며 알 데우는 소리
지난한 희망이여,
우리는 한낮에도 얼음장 밟는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소견>
희망을 발굴하기 위해서 내 밖의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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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의 대표시>
꽃잎 세탁소
김해자
꽃양귀비 붉은 꽃잎 위에 청개구리가 엎드려 있어서 나도 납작 엎드려 뭐 하나 들여다봤더니, 제 목울대로 꽃의 주름을 펴는 게 아닌가. 그 호박씨만 한 것이 앞발 뒷발로 붉은 천 꽉 부여잡고 꽈리풍선 불어가며 다림질하는 동안 내 마음도 꽃수건처럼 펴지고 있었다
개망초 하얀 꽃잎 위에 나비가 날개를 접고 있어서 나도 땅두릅 그늘 아래서 올려다봤더니, 계란 노른자 같은 꽃술을 빨아대는 게 아닌가, 그 상추씨만 한 입으로 꽃잎을 빠는 동안 하얀 베갯잇 같은 구름이 간지러운 듯 몸을 뒤틀었다 하늘이 갓 세수한 듯 말개지고 있었다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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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쳐보다
김해자
장대비에 두드려 맞으며 깻모 심고 오늘 밤 올려다 본 달에게서 쉰 목소리가 납니다 실컷 울고 난 후 서서히 눈물을 말려가는 여자, 탁구공만 한 멍울이 잡힌 눈자위를 바라보는 일은 달을 올려다보는 만큼 아득합니다 고여서 올라오는 눈물이 식으며 말라가는 것을 지켜본다는 것은, 채 말리기도 전에 새 눈물이 솟아나는 눈물샘을 몰래 들여다본다는 것은
바람이 불자 달의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갑니다 딸꾹질이 멈추질 않네요 드높이 올라가버린 구름이 꺼내놓은 달, 먼지 같은 별들을 품어 하늘에는 별가루가 가득합니다 수없이 이지러졌어도 달무리 안에 뭉개진 자국이 없습니다 당신 얼굴에도 젖었던 흔적이 없습니다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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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웃었다
김해자
참 곱다 고와,
봉고차 장수가 부려놓은 몸뻬와 꽃무늬 스웨터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말
먹어봐 괜찮아,
복지에서 갖다주었다는 두부 두모
꼬옥 쥐어주는 구부러진 열 손가락처럼
뉘엿뉘엿 노을 지는 묵정밭 같은 말
고놈 참 야물기도 하지,
도리깨 밑에서 튀어 올라오는 알콩 같은 말
좋아 그럭하면 좋아,
익어가는 청국장 속 짚풀처럼 진득한 말
아아, 해봐,
아 벌린 입에 살짝 벌어진 연시 넣어주는 단내나는 말
잔불에 묻어둔 군고구마 향기가 나는
고마워라 참 맛있네,
고들빼기와 민들레 씀바귀도 어루만지는
잘 자랐네 이쁘네,
구부려 앉아야 얼굴이 보이는 코딱지풀 같은 말
흰 부추꽃이나 무논 잠시 비껴가는 백로 그림자 같은
벼 벤 논바닥 위로 쌓여가는 눈 위에 눈
학교도 회사도 모르는
마늘에서 막 돋아나는 뿌리처럼
늘 희푸른 말
― 김해자, 『니들의 시간』, 창비,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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