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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시in〉 스페셜 집중 조명 _ 서안나 시인편2

스페셜 집중조명

by 미디어시인 2024. 3. 17.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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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대표시

 

애월 2

 

서안나

 

내 늑골에 사는 머리 검은 짐승을 버렸다

애월이라 부르면 밤에 갇힌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맨발로 돌 속의 꽃을 꺾었다

흰 소와 만근의 나무 물고기가 따라왔다

 

백사장에 얼굴을 그리면

물로 쓰는 전언은

천개의 밤을 끌고 온다

귀에서 천둥이 쏟아진다

 

시집에 끼워둔 애월은 눈이 검다

수평선에서 밤까지 밑줄을 그어본다

검정은 물에 잘 녹는다

검정은 어디쯤에서 상심을 찢고 태어나나

나는 밤을 오해한다

 

나는 오늘부터 저녁이다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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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적

 

서안나

 

나팔꽃이 활짝 피지 않는다

아픈 아버지처럼

 

누가

꽃 속에

비련을 풀어두었나

 

벌레가 잎사귀를 다 먹었다

아버지의 폐 숨소리처럼

 

아버지도 그랬다

아침이 되면

나팔꽃처럼

벌떡 일어나실 것만 같았다

 

벌레가

잎사귀를 먹는 동안

꽃은

어떤 생각으로

아버지는

어떤 눈길로

죽음이 먹물처럼 번져가는

몸을 바라보았을까

 

저녁나절

저승의 고요를

보랏빛 핏줄 선 손등으로

두드리는

나팔꽃

 

아프다는 건 절벽 같은 것

 

나팔꽃 지는 저녁은

떠나가는 사람 뒤에서

멍이 들도록 손을 움켜쥐는 것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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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춘첩(春帖) 1

 

서안나

 

달을 가리키는 당신의 손끝이 지혜로운 밤

 

춘첩은 사람 인처럼 맞대고 붙여야

상서로운 기운을 부른다고 했다

봄도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하다

 

눈이 먼 어머니와 저수지 물결을 밀면

귀 없는 당나귀를 타고

당귀차 같은 사람이 물을 건너온다

 

긴 머리 빗어

연화지 저수지를 세 번 태우면

늦은 편지는 이미 분홍이니

우리는 연꽃 위를 눈먼 쥐처럼 걸어가고

 

어머니의 낡은 카세트 속

지장보살은 늙지도 않는다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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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춘첩(春帖) 2

 

서안나

 

입춘이라 쓰면 착하게 살고 싶다

 

매화 가지에 꽃을 불러 아홉 가지 산나물에 찬술을 마신다

늙은 개는 하루를 굶기고 집안에서 칼질을 삼간다

붉은팥을 뒤로 던지면 매운 수선화 피고 저수지가 깊어진다

 

편지를 쓰면 수심이 깊어 두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노래하고

매화는 아이들 여린 잇몸에 새 이로 돋고

 

볏짚을 태우면 나는 매화 속에서 병이 든다 

 

고서를 펼치면 화요일의 감정은 반듯하고

눈멀고 귀 멀어 매화는 무겁다

매화향기 가두어 차로 마시면

나이 삼십에는 꽃이 어렵고

사십에는 아픈 곳에서 꽃이 핀다

 

커다란 바위 등에 이고 걸으면

서른 걸음마다 물결이 깊어진다

이를 윤이월이라 부르면

풍경에도 사람냄새 깃들어 진흙 물고기가 몰려든다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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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공무도하

 

서안나

 

1

 

호스피스 병동에서 바라보는 밤은 왜 사무적인 걸까

의사는 호스피스 병동 앞에서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한다고 했다

 

2

 

고레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보았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피를 나눈다는 건 무엇일까

 

3

 

침대에 기대어 잠든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할 때

왜 먼지 냄새가 나는 걸까

병실 창밖에는 메마른 구름비나무 한 그루

 

4

 

아픈 사람은 5층 같아서

걸어 올라가다 보면 내가 먼저 지치지

간병은 지루하고

지친다는 것과 슬프다는 것은 구별하기가 어려워

나는 새벽에 병원 지하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인간의 존엄함에 대하여 생각했다

 

느리게 흘러가는 병실의 시간과 창밖의 구름들

나는 구름을 쳐다보며

어떤 기적 같은 형상을 찾고 있었는지도 몰라

 

이 저녁

병자들은 무용하여 아름답고

저녁의 문장은 링거처럼 맑고 차갑지

물 끝에 아스라이 서 계신

당신,

 

공무도하

공경도하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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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애플민트

 

서안나

 

밤에 애플민트를 꺾었다

꺾은 자리가 떨렸다

실직한 이와 오랜만에 만난 술자리였다

 

김 모 시인이 말했다

여리고 푸른 것들은

쓰다듬어 손으로 향기를 맡는 거라고

 

술집 유리창에 발이 사라진

나와 일행이 허공에 떠 있었다

실직한 이의 얼굴이 창백했다

집단 학살터였던 박성내 다리 앞이었다

 

얼굴이 붉어진 나를

실직한 자의 밤을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9 연대 군인 트럭에 실려와

집단 학살된 백 오십 명의 맨발을

 

이지러진 밤의 애플민트가

사과 향기로 어루만져 주는 밤

 

그 여리고 푸른 것들 앞에

내 무심한 폭력을 내려놓는다

다시는 풀과 꽃을 꺾지 않으리

 

*박성내 다리:4·3 사건 때 함덕국민학교에 모인 와흘, 함덕 등의 주민들 3백여 명 중, 자수하면 살려준다며 15십 명을 철사로 묶어 트럭에 태웠다. 9 연대 3대대는 제주시 아라동 박성내 다리에서 이들 모두 집단 학살하고 시체는 불태웠다.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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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디창옷

 

서안나

 

말은 사람에게 상처 입혀 무릎 끓게도 하지만

봇디창옷은 아픈 곳을 감추는 소매가 긴 저녁이 되기도 합니다

 

점점 사라지는 제주어를 적어보는 봄밤

제주의 아이들은 정작 제주어를 모릅니다

 

나이 든 어머니와 옷장을 정리하다 낡은 봇디창옷에 손이 갑니다

봇디창옷에 뭉클거리는 오 형제가 검은 배꼽을 오똑 내놓고 누워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할 말이 많아집니다

어머니의 제주어에는 뼈를 버린 사람이 삽니다

눈과 입에서 웃음이 먼저 번지는 어머니

세상의 모든 국경이 삶은 국수처럼 무너집니다

 

바람 든 콥데사니 껍질 같은 어머니의 귀에서

아이들이 옷을 벗고 물뱀 되어 흩어지고

 

맞춤법에 걸린 바당과 할망당 심방들이 제물 차롱을 지고

징게징게 꽹과리를 치며 걸어 나옵니다

 

어미가 물애기에게 소매가 긴 봇디창옷를 입힌 마음

80년 된 콥데사니 같은 알싸한 제주어가

내 눈에도 뾰족하니 돋습니다

 

*봇디창옷: 귀한 아기에게 소매가 밤처럼 긴 옷을 삼베로 만들어 입힌 어미의 마음.

어미는 아기가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동안 깃과 섶을 달지 않고 기다리지.

*콥데사니: 제주에선 콥데사니를 제사 음식에 쓰지 않지. 콥데사니라고 부르면 제주의 제삿날이 마늘처럼 매워지네.

*심방: 신을 모시는 심방들이 징게징게 굿하는 날 신도들이 준비한 제물 든 차롱을 굿당에 나란히 올린다. 억울하게 죽은 저싱 사름을 위해.

*물애기: 물애기라고 부르면 나도 물렁거리는 진흙덩어리가 되네.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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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 순암 서간(順菴 書簡) 2

-삼불후(三不朽)

 

서안나

 

공자가 자신이 살던 노나라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춘추이며 이를 좌구명이 해석한 것이 춘추좌전이오

춘추좌전에는 죽어서도 썩지 않는 세 개의 것이 있다 하였지

 

덕을 세우는 입덕과 공을 세우는 입공

마지막이 입언()이라

글과 책을 남겨 그 내용이

후대에도 죽지 않고 썩지 않는다 하였지

 

글을 읽고 글을 써 서책을 엮는 것은

이 글이 진언처럼 물결에 밀려가고 밀려와

하늘을 찢고 땅을 열고

다시 물결로 돌아오는 이치이니

물결은 천의무봉 하여

하늘과 땅과 사람을 껴안아

천지인 하나가 되는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의 이치이니

 

살아서 죽어

죽어서 살아 그대에게 닿는

팔만 사천 자의 썩지 않는 문장이라

삼불후이니

 

이마에 썩지 않는 눈을 그리고

그 눈을 뜨고 문장으로 물결치시라

— 『애월, 여우난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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