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호
한백양의 시들은 진솔한 일인칭적 진술이 압권이다. 일인칭의 진술들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진지한 태도 면에서 일인칭을 능가할 언어들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백양의 일인칭은 자기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실패하고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거부한다.
한백양은 자칫 진부하고 촌스러운 함정에 빠지기 쉬운 일인칭 화자를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진 관찰자로 부각하는 데 크게 성공하고 있다. 한백양은 일인칭의 화자를 매우 생산적으로 활용하면서도, 그 존재 가치를 노출하지 않고 있다. 오직 이웃들을 바라보고 가장 효과적으로 대변해 줄 관찰자로서 일인칭 화자는 존재한다.
“애정을 가진 대상들이라면, 그 대상들에 대한 것들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는 말을 김기택 시인의 육성으로 들은 적이 있다. 한백양의 시선은 김기택 시인이 가진 대상에 대한 분석적 시선을 넘어, 응원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기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지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며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 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 한백양 ‘왼편’ 전문, 2024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화자는 소고기를 사줄 수 있는 내 편과 빌라 사람들에게 다시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고양이에게조차 따뜻한 시선을 멈추지 않는다. 고양이도 왼편에 있는, 함께 어우러질 따뜻한 이웃이다. 동시에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하고 습관처럼 다투는 그 이웃들의 따스한 피를 입증할 매개체가 된다.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다’
이웃들에게 보내는 따스한 응원과 희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능력을 갖춘 한백양의 시어들은, 대상이 놓여있는 왼편에 대한 애정에 그치지 않고, 반대편인 오른쪽의 미래에도 희망을 걸어 놓고 있다.
오른편의 ‘오래된 미래’는 묘하게 매력적으로 읽힌다. 처음에는 오랫동안 품어왔던 덧없는 희망으로, 네거티브 톤으로 읽히다가, 이내 ‘싸운 후에도’ 습관적으로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 오래전부터 품어온 희망으로 전환된다. 시를 읽을 때 다의적으로 읽히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똑같은 자리에 놓여있는 똑같은 시행이 분화하면서 부피 성장을 하면 더 큰 파장을 얻을 수 있다.
이 시 한백양의 ‘왼편’은 전혀 새로운 것 없는 닳디 닳은 왼편, 오래된 빌라, 다툼, 현관, 고양이, 소고기, 밥, 부서진 화분 같은 시어들을 사용하면서도, ‘그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이게’하는 간단한 장치들로, 전혀 색다른 분위기와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온기를 불러일으킨다.
한백양은 이 시에서 왼편에 대한 따스한 사랑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곳을 온기가 샘솟는 우물로 이용하는 연출가가 된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했던 가족들’, ‘한 번씩 크게 싸우는’ 날들도 희망의 편이 될 수 있다.(최병호 시인)
최병호 시인
해남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수료. 2021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으로 시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이메일 : topoet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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