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호 시인
문학 비평에서 역사 전기적 관점을 배제하고 텍스트를 중심에 올려놓고 비평해도, 온전하게 그것들을 걷어낼 수는 없다.
진은영의 시에서 이 점은 특히나 중요하다. 그것은 그가 철학을 연구하는 철학자라는 측면에서 더 중요하다. 시인 진은영 혹은 진은영의 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철학자 진은영이 쓴 시라는 한 겹의 필터를 가지고, 그의 시를 대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출발선에서부터 일정한 편견을 지닌체 시를 접한다면 진은영의 시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쉬클로프스키(V. Shklovscky)로 대표되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관점대로 온전히 작품 안에서만 작품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그러한 관점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어떤 인터뷰에서 진은영 시인이 문청시절 ‘시를 잘 쓰려면 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대학을 철학과로 가게 됐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글에서 아무리 쉬클로프스키적 관점에 충실해지려 해도 온전하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세상의 작품들이 그의 삶과 철학과 맞닿아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작품에서 훌륭한 페르소나를 창출했다고 하더라도, 그 페르소나 역시 시인이 창출한 페르소나이기 때문에 시인의 영향력에서 온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시인과 완벽하게 분리된 페르소나를 창출해야 성공적인 페르소나다. 이런 명제를 제시한다면 다른 논점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일단 이 부분은 논외로 한다.
3부로 구성된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사랑’이다.
‘청혼’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사랑들은 담은 1부 ‘사랑의 전문가’가 그러하고, 세월호 희생자 예은양에 대한 추모시라고 단정해버릴 수만은 없는, 추모를 넘어서 치유의 영역까지 들어선 2부 ‘한 아이에게’도 중심축은 사랑이다. 여기서 사랑은 희생자 예은양과 그 가족의 내면에 깊숙이 침투해, 그 아픔을 깊이 공감해주고 뜨거운 눈물을 함께 흘릴 줄 아는 사랑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단지 깊이 공감하는 사랑에 그치지 않고, 아직 살아있는 가족에 대한 따뜻한 배려까지 담긴 깊이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은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라고 담담하게 독백하고 있는 3부 ‘사실’에 와서는 변증법적으로 통합되고 있다.
슬픔은 슬픔대로 우리가 안고 가야 할 몫이라고 나직하게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시인은, 슬픔의 몫조차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온전한 우리들의 몫, 우리들의 사랑이라고 얘기한다.
이제 그의 시들을 본격적으로 읽어보자.
진은영 시인의 시에서는 잘 우려낸 찻물처럼 깊은 은유들이 손에 쥔 공기처럼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내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청혼」 전문,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진은영의 네 번째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 첫 시인 「청혼」의 1행을 읽었을 때, 한쪽 무릎을 절로 ‘탁’ 치게 된다.
사랑을 고백하는 오래된 진술들을 책으로 묶는다면 족히 수천 권은 될 것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혹은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이보다 더한 사랑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하늘의 별을 따다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주만큼 사랑한다는 것도 아닌, 단순한 하나의 진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이처럼 사랑에 대한 완벽한 진술은 없다. 이 문장에서 핵심은 ‘오래된 거리’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에게 길들어 낡고 편안한 거리가 만들어내는 이 은유는, 시의 핵심 키워드이다. 동시에 ‘오래된 거리’를 성장하고, 성숙하게 하는 물적, 공간적, 정신적 토대가 된다.
“오래된 거리”라는 기표에서 다양한 독자들이 안고 있는 기의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는 별을 키운다. 벌 떼 같은 별들, 별 무리 같은 벌 떼들은 등가 가치로 작용하고, 서로 부딪쳐 사랑의 기표로 작동한다. 그리고 화자는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도 아첨하지 않을게’ 하며 사랑의 미래를 예단하지 않는다.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라는 묘사는 눈에 보이듯 선명하면서도, 손가락을 간지럽히는 작은 울림이 마음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큰 울림으로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화자는 ‘과거에도 그랬듯 미래에도 아첨하지 않을게’하며 허황한 약속으로 미래를 예단하지 않는다. 지금 이 사랑은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처럼 상대에 대해 미안함을 고백하고 있지만, 이 사랑이 미래에도 변치 않는 영원불변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다. 사랑의 감정과 일정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진술은 여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열린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더 큰 사랑의 보폭을 감지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묘사와 진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문장을 접한 독자들은, 어느새 사랑의 원형 앞에 바짝 다가서 있다.
그리고 마침내 화자와 함께 ‘인류가 아닌 한 여자를 위해 독배를 마시는’ 결심에 들어서게 된다.
시의 화자와 같은 상황의 독자라면 그 공명은 몇십 배에 이를 것이고, 이런 상황은 인류 보편의 상황이기 때문에 이 시는 시집에 묶이기 전부터도 많은 공감을 획득한 시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우리는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시가 독자들의 깊은 공감까지 획득했다는 보편적 명제를 확인한다.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시라는 것은 분석적으로 얘기하면, 시를 읽는 매력이 있어, 자꾸 다시 읽게 된다는 의미로 유추할 수 있다. 깊은 공감을 획득했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꾸만 다시 읽고 싶은 시가 고개까지 끄덕이게 했다면, 이것은 지구에서 시 쓰고 있는 모든 시인이 꿈꾸는 그런 시가 아닌가.
그래서 시집으로 묶이기 전부터도 공감의 대역이 깊고, 또 넓었나 보다.
진은영의 언어들은 때로는 감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는 오늘 밤 잠든 당신의 등 위로
달팽이들을 모두 풀어놓을 거예요'
(중략)
눈 내리는 언덕에서 새하얀 등 위로
나는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을 겁니다
―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문학과지성사 , 2022.
시인의 감각적 언어들은 형식미학이나 시적 내구성과 별개로 일차적으로 감각으로 읽힌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감감적 언어들은 독자들이 그 시행을 읽어내기 이전에 감각적 촉수를 통해 만나고 있다. 독자들이 머리로 가슴으로 시를 읽어내기 전에 달팽이들은 이미 등 위를 서서히 산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뛰어난 미학적 성과들과 별개로 이 시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한편으로 세월호 희생자와 가족들을 위한 진혼곡이다.
진은영의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세월호 관련 진혼곡은 기존의 추모 시들과 다른 층위를 보여준다.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 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휴대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겨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 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 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와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뜻하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뭉게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 햇빛이 따뜻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빛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가 기억의 기둥들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한숨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아이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후략)
― 「그날 이후」 중에서,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 문학과지성사 , 2022.
이 시에서는 죽은 자의 입을 빌려서 산 자들,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세월호 추모 시들과 다른 층위를 보여주고 있다. 희생자만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가족들도 위무의 대상으로 올려놓고, 가족들이 듣고 싶은 희생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우리가 겪는 이 아픔 중에 남아 있는 가족만큼의 아픔이 있겠는가?
이때 죽은 자를 대신해 살아있는 자들을 위무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을 가졌는지는 잘 모른다.
그리고 이 시들의 미학적 완성도는 독자들이 더 큰 슬픔에 빠지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픔은 치유의 아픔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완벽하게 예은양으로 변신한 화자는 예은이의 꾸미지 않은 육성으로 남아있는 가족들을 안아주고 있다. 이 시편들을 읽는 독자들은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험과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화자는 철저하게 냉정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미안해’라는 서술로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독자들을 어느새 깊은 슬픔의 수렁에 빠지게 한다. 우리가 시에서 거리두기를 왜 해야 하는지, 이 한 편의 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를 대하는 독자들이 느끼는 공감은 깊고 넓을 수밖에 없다.
이 시집에서 우리가 가장 눈여겨 살펴야 할 것은 아픈 사랑들을 긍정의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은 상황을 정확하게 적시하고, 긍정의 거리두기, 치유의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다.
별들이 움직이지 않는 물 위를 고요가 흘러간다는 사실
물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
오늘 밤에도 그 애가 친지들의 심장을 징검다리처럼 밟고
물을 무사히 건넌다는 사실
한양대학교 옆 작은 돌다리에서 빠져 죽은 내 짝은 참 잘해줬다, 사실은
전날 내게 하늘색 색연필을 빌려줬다
늘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이 많다, 사실일까
사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죽은 사람에게는 돌려주지 못한 것도 많을 텐데
노래가 여기저기 떠도는 이유 같은 거
그 이유가 여기저기 떠도는 노래 같은 거
사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 짝은 입을 꼭 다물고 건져졌다는데
말할 수 없다
그 애가 들려주려던 사실
어둠의 긴 팔에 각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산 사람대로 죽은 사람대로 사실대로
― 「사실」 전문,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화자는 사실들을 가감 없이 적시하고 있다.
‘물에 빠진 아이가 있었다는 사실’과 ‘오늘 밤에도 그 애가’ ‘물을 무사히 건넌다는 사실’
일단 ‘사실’들을 거리를 두고 서술하고 있다. 이 거리는 치유의 거리로 작동하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의 적시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희망찬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을 뿐인데, 그 객관적인 사실들을 통해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온전히 ‘사실’들로 구성되었을 이 서사를 통해 우리는 망각을 통한 치유가 아니라,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치유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산 사람은 산 대로 죽은 사람은 죽은 대로’ 공존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변증법적 통합 속에 영원히 함께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이 한 권의 시집으로 진은영 시인의 시를 읽어내는 것은 코끼리 다리 만지기와 같을 것이다. 진은영 시의 보폭은 그가 가진 세계관만큼이나 넓고 또 깊다.
그것은 진은영 시인이 앞서 언급한 철학을 공부하는 철학자라는 측면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당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무게도 잘 아는 시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진은영 시인은 시 쓰는 자의 책무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가 발표한 여러 논문들과 글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진은영은 어떤 경우에도 미학적으로 게으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시를 쓰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미학적 ‘완성도’라는 칼은, 그 서슬 퍼런 칼날은, 무엇이든 다 베어버린다.
이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는 그 다양한 작품의 층위들과, 어떠한 상황에도 잃지 않고 있는 미학적 견지들을 엿볼 수 있다.
시를 읽는 독자들은 오래된 거리에서 머물던 시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최병호)
최병호 시인
해남 출생,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수료. 2021년 《열린시학》 신인작품상으로 시 등단, 한국작가회의 회원. 이메일 : topoetr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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