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한 흰색
송재학
불쑥 흰색의 눈에 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수컷 곰이 배고픔 때문에 새끼를 잡아먹는 북쪽에는 남몰래 우는 낮과 밤이 있다 흰색의 목마름이 색깔을 지운다면 지평선은 얼음을 지운다 허기진 북극곰이 흰색을 삼키거나 애먼 흰색이 북극곰을 덮친다 얼룩진 흰색과 검은 흰색이 아롱지듯 겹치고 있다 솟구치는 선혈과 찢어지는 피륙마저 희고 붉기에 금방 얼어버리면서 흰색이 아니었지만 흰색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흰색이 되고 만다 가까스로 흰색 너머 낮달의 눈가가 짓무르다면 유빙을 떠도는 드라이아이스는 유령이라는 단막극을 되풀이한다 용서를 구하는 북극황새풀이 흰색 앞에 엎드린다 사랑한 것들로부터 상처받는 흰색이다 흰색의 손과 내부가 서로 등 돌리고 있다 하루 종일 환하거나 어두운 여기 흰색이라는 귀 없는 해안선이 자란다
— 『슬프다 풀 끗혜 이슬』, 문학과지성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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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생태계가 붕괴되고 있다. 기온 상승으로 얼음이 녹아 그곳에 살고 있던 동식물에게 영향을 주어, 북극의 대표 동물인 북극곰마저 사라지게 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실제로 먹잇감을 찾지 못한 수컷 곰이 “배고픔 때문에 새끼를 잡아먹는”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그런데 영상에 잡힌 비극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예기치 못한 비극이 북극에서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송재학 시인은 「불가능의 흰색」에서 상징적인 색인 ‘흰색’을 시적 코드로 활용해 참극의 단면을 빼어나게 형상화시켰다. 시인에게 북극은 ‘흰색’ 그 자체다. 끝없이 펼쳐진 순수한 ‘흰색’. 남극과 다르게 얼음과 눈으로만 뒤덮인 북극은 그것들이 녹으면 땅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바다가 나타난다. 그러니 북극의 ‘흰색’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절대성을 가진 ‘흰색’이다.
그런데 참극으로 인해 ‘흰색’이 이제 슬픔의 아이콘이 되고 말았다. 생존을 위해 흰색이 흰색을 잡아먹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흰색의 목마름’이, ‘허기진 흰색’이 북극곰 가족을 덮쳤다. “얼룩진 흰색과 검은 흰색이 아롱지듯 겹치고 있다 솟구치는 선혈과 찢어지는 피륙마저 희고 붉기에 금방 얼어버리면서 흰색”은 ‘흰색’을 잊은 것처럼 다시 눈과 얼음으로 덮여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동족을 잡아먹은 현장을 감쪽같이 삼켜버린 흰색을 순수한 ‘흰색’이라고 인식하고만 있다.
북극에서 ‘흰색’을 추모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북극곰과 함께 존재했던 것들 뿐이다. 눈가가 짓무른 ‘낮달’이거나 “유령이라는 단막극을 되풀이”하는 떠도는 유빙이거나, “용서를 구하는 북극황새풀”들이 그것이다. 비극의 원인 제공은 분명 인간들이 했는데, 인간들은 생태계를 원래대로 복원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북극곰을 그저 연민의 눈으로만 바라보고 안타까워만 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환경보호적 측면만은 아니다. 그것을 함의한 순수 본질의 파괴에 대한 경각심이다. 순수 본질은 윤리적인 · 이성적인 잣대를 벗어난 당사자가 가진 고유한 속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시인이 말한 대로 “사랑한 것들로부터 상처받는 흰색”이 되고 말 것이다. 순수 본질이 파괴되어 서로가 서로를 침탈하는 그런 날이 오기 전에 우리 자신 안에 자리 잡은 본색(本色)을 복원하여 가꾸어 나가는 되돌아봄을 실천하자.(하린 시인)
하린
2008년 《시인 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이 있고,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와 시 창작 안내서 『시클』과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와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가 있음. 청마문학상 신인상(2011),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2015), 한국해양문학상 대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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