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저녁의 버스킹
김종해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이 와서
내 몸속에 악기(樂器)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그간 소리 내지 않았던 몇 개의 악기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동안
길은 더 저물고 등불은 깊어진다
나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
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
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
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꾼다
오늘밤 이곳이면 적당하다
이 거리에 자리를 펴리라
나뭇잎 떨어지고 해지는 저녁
내 몸속의 악기를 모두 꺼내어 연주하리라
어둠 속의 비애여
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이여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
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리라
사랑과 안식과 희망의 한때
나그네의 한철 시름도 담아보리라
저녁이 와서 길은 빨리 저물어 가는데
그 동안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
내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
오늘밤 악기 위에 얹어서 노래하리라
― 『늦저녁의 버스킹』, 문학세계사, 2019.
--------------
버스킹(busking)은 ‘길거리에서 공연하다.’라는 의미의 버스크(busk)에서 유래된 용어다. 공연자인 버스커(busker)들은 악기, 작은 마이크, 휴대용 앰프 등을 들고 다니며 거리 곳곳에서 관객과 소통하면서 자유롭게 음악을 즐긴다. 김종해 시인의 「늦저녁의 버스킹」은 그런 버스킹의 상황을 비유적으로 끌어와서 화자 자신이 가진 내면적 세계를 드러낸 시다. 시 속에서 화자는 “나뭇잎 떨어지는 저녁” ‘네거리’에 도달하자마자 자신이 하나의 악기가 되어 있음을 감지한다. ‘버스킹의 시간’ 그러나 이 버스킹은 “나를 위해 내가 부르고 싶은 나의 노래”로써 주체자도 자신이고 관객도 자신일 뿐이다. 서정시가 일인칭의 자기 고백의 성격이 강하기에 시인은 화자만이 느끼는 ‘몸관악기’의 상황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깃든 서정의 무늬를 토로하고 있다.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삶을 살았던 화자는 죽음이 가까이 도달해 있음을 예견한다.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인식을 가지고 현존과 현존 이후의 상황을 언술한다. “오랫동안 먼 길 걸어왔음으로” ‘나’의 “길은 등 뒤에서 고단한 몸을 눕힌다”. 인고의 세월 내내 화자가 깨달은 것은 무상(無常)이다. “삶의 길이 서로 저마다 달라서/ 네거리는 저 혼자 신호등 불빛을 바꾸”고 각자의 ‘길’을 살게 한다. 그곳에서 화자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악기’를 꺼내 연주를 준비한다. 마치 마지막 버스킹을 하려는 듯이……. 왜 하필 ‘거리’인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인산인해를 이루는 평범한 거리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소진시키려 하는가? “어둠 속의 비애”나 “아픔과 절망의 한 시절”을 모두 잊고 자신을 완전히 휘발시키려는 무욕의 정신이 시인에게 있어서 일 것이다. 자신의 생을 되돌아봄에 있어 “이생에서 뛰놀았던 생의 환희”는 물론 “마음속에 내린 낙엽 한 장도” “바람처럼 멀리 띄워 보내”려는 의지를 보였기 때문이다.
「늦저녁의 버스킹」을 읽으면 천상병 시인의 「귀천」에 나오는 구절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가 떠오른다. 그러나 김종해 시인의 인식은 천상병 시인의 인식과 조금 다른 차이를 드러낸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 비워내듯 “나그네의 한철 시름”을 노래하지만 그 이후의 어떤 것도 바라지 않는다. 진짜 무욕의 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린
2008년 《시인 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야구공을 던지는 몇 가지 방식』, 『서민생존헌장』, 『1초 동안의 긴 고백』이 있고, 연구서 『정진규 산문시 연구』와 시 창작 안내서 『시클』과 창작 제안서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와 『이것만 알면 당신도 현대 시조를 쓸 수 있다』가 있음. 청마문학상 신인상(2011), 송수권시문학상 우수상(2015), 한국해양문학상 대상(2016),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2020) 수상.
하린 시인의 〈감동과 감탄〉 10 _ 김종해의 「늦저녁의 버스킹」 < 포엠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최병호 시인의 〈퀘렌詩아〉 2 _ 한백양 시인의 ‘왼편’ (0) | 2024.03.17 |
---|---|
최병호 시인의 <퀘렌詩아> 1 _ 진은영 시인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1) | 2024.01.19 |
하린 시인의 〈감동과 감탄〉 9 _ 김남조의 「심장이 아프다」 (1) | 2023.10.11 |
하린 시인의 〈감동과 감탄〉 8 _ 송재학의 「불가능한 흰색」 (0) | 2023.08.22 |
하린 시인의 〈감동과 감탄〉 7 _ 신미균의 「쥐약」 (0) | 2023.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