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및 인터뷰 진행: 이정은 시인
박일환 시인은 1997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하여 시집 『지는 싸움』, 『덮지 못한 출석부』, 『등 뒤의 시간』과 청소년시집 『학교는 입이 크다』, 『만렙을 찍을 때까지』를 비롯해 『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 『청소년을 위한 시 쓰기 공부』, 『국어사전에서 캐낸 술 이야기』, 『맹랑한 국어사전 탐방기』, 『국어사전 독립선언』, 『문학 시간에 영화 보기 1,2』 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뿐 아니라 청소년 시, 동시, 인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집필을 이어온 시인이자 작가이다.
이번 시집 『귀를 접다』는 이순을 넘긴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세상에 대한 이해와 이웃에 대한 연대가 담겨 있다. 시인은 먼저 “그런 겨우를 위해/당신이나 나나 참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시인의 말)라고 고백한다. 그런 겨우를 갸륵하게 여기기로 했다고. 시인의 이런 세심한 마음은 나이 육십을 넘어서면서 겨우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귀를 접다’는 나이 육십을 의미하는 이순(耳順)의 의미와도 상통한다. 이순은 귀가 순해진다는 뜻으로 나이 60세의 비유적인 표현인데 시집의 곳곳에서 세상과 삶을 알아가는 시인의 지혜가 담겨 있다. 박일환 시의 가장 큰 미덕은 “작거나 소외된 존재들에게 눈길을 보내는 따뜻하고 선한 마음”(문종필 문학평론가)이라는 평가는 이번 시집에서 더욱 도드라진다.
박일환의 “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들들은/모두 비문투성이”(「귀를 접다」)라는 성찰을 통해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이순이 되어야 타인의 글을 읽고 귀를 접을 수 있는 여유와 지혜를 얻는 것이다. 시인은 인간의 글과 사유와의 만남뿐 아니라 새들의 안부에까지 관심을 가진다. 새들이 사라지는 동안 아무도 안부를 묻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직시한다. 그리하여 “새들이 사라지고 있는 동안/인간만 잘 지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새들의 안부」)라는 자성의 목소리를 낸다. 시인의 이 세계에 대한 관심은 스카이라인에서 뛰어내린 아이, 김유신의 말, “키가 커갈수록 더 많은 세입자를 받아들이는”(아름다운 일) 나무와 꽃, “서로 부딪쳐도/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는” 풀, 멈출 줄 아는 자동차, 인간에게 깨우침을 줄 수도 있는 개구리, 마음을 눌러주는 양떼구름 등등 사물, 동물, 식물 가릴 것 없이 넓게 드리워져 있다. 세상 모든 존재들을 이웃으로 부르는 이유는 “돌아보는 마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먹고 살겠다는 이유로/다른 생명의 숨부터 끊어놓고 보는/오랜 습속”(「돌아보는 마음」)은 잊어야 한다. “돌아보는 마음이 없으면/경배라는 자세는 모두 헛짓”이라는 것을 시인은 알기 때문이다.
박일환이 이번 시집에서 마련한 이웃에 대한 마음가짐은 “인간과 인간을 넘어서,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을 모두 통괄하는 이 연대의 창조는, 어쩌면 ‘이웃’에 대한 인간학적 굴레에 갇혀 있던 우리의 감각을 깨뜨리는 가장 강력한 현사실성의 응답”(최진석 문학평론가)이다.
<미디어 시in>에서는 집중조명으로 박일환 시인과 인터뷰를 하였다.
질문: 시집 『귀를 접다』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독자에게 인사 말씀해 주세요.
답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는 건 독자를 만나기 위해서인데, 이렇게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시인은 무엇보다 시로 말해야 한다고 하지만, 때로는 시인이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들도 계실 것 같습니다. 제가 대단한 생각을 지닌 건 아니지만 이정은 시인이 독자를 대신해서 질문한 내용과 그에 대한 답변을 통해 조금이나마 시를 이해하고 즐기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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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인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나 에피소드가 있는 시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답변: 모든 시인은 시를 쓸 때 특별한 의미를 담아 내기 위해 애를 쓸 겁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라면 굳이 시라는 형식을 통해 드러낼 필요가 없겠지요. 그러니 제 시집 안에 담긴 모든 시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다만 독자도 그렇게 여기면서 받아들이느냐는 건 다른 문제겠지요. 그래서 시인과 독자의 접점이 잘 이루어지는 시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고군조 자1, 고군조 자2」와 연관지어 얘기하고 싶은데요. 이정은 시인 덕분에 쓸 수 있었던 시거든요. 몇 년 전 제주에 갔을 때 마침 이정은 시인이 제주민예총에서 조 심기 하는 행사가 있는데 같이 가보자고 해서 따라갔잖아요. 4.3 당시 민간인 156명이 학살당한 무등이왓이라는 곳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조 농사를 지었던 걸 그대로 재현해서 가을에 좁쌀 술을 담아 제주(祭酒)로 쓸 때까지 이어지는 프로젝트라고 하더군요. 거기서 조 심기를 도와주다가 조밭 사이에 희생당한 이들의 이름을 적은 흰 종이를 늘어놓은 걸 봤어요. 그중에 고군조 자1, 고군조 자2라고 된 걸 보는 순간 마음이 아뜩해지더군요. 고군조 씨의 두 자녀일 텐데, 미처 이름도 짓지 못한 상태에서 희생당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참혹하다는 말 외에 다른 표현을 찾을 길이 없었어요. 나중에 그 기억을 떠올리며 쓴 시인데, 그 후 베트남 문학 기행을 갈 일이 있었어요. 그때 한국군에 의해 희생당한 민간인을 추모하는 하미마을 위령비에 참배를 하게 됐는데요. 안내판에 희생자들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거기도 이름이 없는 아기들 명단이 있더라고요. 제주와 베트남의 비극이 겹쳐지면서 저절로 눈물이 났어요. 그 자리에서 참가자들에게 제 시 「고군조 자1, 고군조 자2」를 낭송해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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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집 『귀를 접다』를 통해 전하고 싶은 바가 무엇이고, 독자들이 무엇을 어떻게 읽어내면 좋을까요?
답변: 간명하게 답변을 하자면 시를 통해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시에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고, 그런 걸 배제하면서 언어의 조탁에 신경을 쓸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세상과 사물,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이 먼저 담겨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독자들이 제 시를 읽고 이러저러한 마음으로 시를 썼겠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시는 기본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마음결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무리 바깥세상과 풍경을 끌어들여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시인의 내면에 들어와서 재구성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최종적으로 시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번 시집 역시 그런 제 마음의 무늬가 여러 형태로 담겨 있으니, 그런 점을 유념해서 살펴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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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시를 쓸 때 눈이나 마음이 많이 가는 곳이 있을 텐데요. 그런 지점들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풀어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시인마다 자기만의 눈이 있을 테고, 거기서 그 시인의 개성이 드러나겠지요. 저는 높은 곳보다 낮은 곳, 밝은 곳보다 그늘진 곳,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풍경이나 사물, 쓸모없다고 버려진 것들 쪽으로 눈이 많이 가는 편입니다. 남들도 다 주목하는 곳이라면 굳이 저까지 시선을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데요. 입이 없어서 스스로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대신해 주는 역할에 시인의 필요성이 존재할 거라고 믿는 편입니다.
이번 시집에 「미안하다」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그동안 수많은 시인이 창문을 소재로 시를 써왔는데, 어느 순간 창문을 지탱해 준 창문틀은 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창문틀 없이 창문이 존재할 수 없는데, 그동안 창문틀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었던 거지요. 그런 창문틀의 헌신과 외로움, 그렇게 관심 바깥으로 밀려나 있던 존재에 대해 나 역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미안함을 담아본 시입니다. 가지치기를 통해 잘려 나간 나뭇가지들(「어떤 비밀」)이라든지, 김유신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어디에 묻혔는지, 묻히기는 했는지도 모르는 말의 운명(「김유신의 말」)을 다룬 시편들도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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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시의 사회적 효용성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겠는데, 이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요?
답변: 시가 지닌 가치나 효용성이 물질과 재화로 환원될 수 있는 걸 뜻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회의 진보나 변혁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1980년대에는 문학이 사회변혁을 위한 선전․선동의 무기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견해가 널리 퍼지기도 했지만 그건 특정한 시기에 국한된 현상으로 이해해야 타당하겠지요.
시는 언어로 이루어지는 예술 장르입니다. 언어가 가진 힘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언어를 수단으로 삼은 시도 분명히 어떤 힘이 있을 겁니다. 비판을 끌어내는 힘, 위로와 치유를 주는 힘, 사유와 성찰로 이끄는 힘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요. 시는 그런 힘을 강력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예술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는 세상을 직접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각자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도록 하고,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인지 고민하게 하고, 그러면서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일 테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겁니다. 세상에 실망해서 주저앉는 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 나아가 자연 만물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설 수도 있을 테고요. 싸움이라는 거창한 말을 썼지만, 대단한 투사가 되라는 게 아니라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못한 것을 구별하고 최소한 아름답지 못한 세상의 질서에 반성 없이 끌려가거나 물들지는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동엽 시인의 「좋은 언어」라는 시가 있는데요.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한다고 했던 시인의 말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요즘 총선을 앞두고 여야 할 것 없이 여러 정치인의 막말이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잖아요. 그런 삿된 언어가 끌고 가는 세상이 아니라 좋은 언어가 사람들 마음으로 스며들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시가 담당해야 하는 역할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가 세상이나 사회와 관계를 맺는다면 그런 방식이 되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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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청소년 시집과 동시집을 비롯해 그 밖에도 우리말과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은 책을 내셨는데요. 그런 동력이 어디서 오는 걸까요?
답변: 읽고 쓰는 일 외에는 제가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그렇습니다. 특별한 취미도 없거니와 교사로 퇴직한 뒤에는 시간 여유가 많아지기도 했고요.
청소년 시집과 관련해서는 제가 교사였다는 사실과 연관 지을 수밖에 없는데요. 청소년 시라는 장르를 처음 제시한 건 박성우 시인이었지요. 박성우 시인이 『난 빨강』이라는 청소년 시집을 낸 이후 많은 시인들이 청소년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요. 그 시집이 저를 반성의 길로 이끌더군요. 교사도 아닌 사람이 청소년을 위한 시를 썼는데, 청소년을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교사인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싶었던 거지요. 그래서 쓰기 시작한 청소년 시들이 쌓여 두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동시 역시 그 무렵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이유는 비슷합니다. 저에게 조금이라도 시를 쓰는 능력이 있다면 그걸 꼭 성인들만을 위해서 쓸 필요는 없겠다 싶었던 거지요.
시를 쓰다 보면 아무래도 국어사전을 많이 보게 되고, 말에 대한 관심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어사전들을 살펴보면 볼수록 허술하고 오류도 많더군요. 그런 점이 아쉬워서 몇 권의 책을 쓰게 됐고, 다른 장르의 책들도 시를 잘 쓰기 위해 이런저런 공부를 하다 보니 거기서 나온 곁가지처럼 갈래를 뻗어가게 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내기는 했지만, 제 글쓰기의 본령은 시에 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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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시인님의 시론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변: 이런 식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종종 가슴과 머리를 동시에 치고 가는 시가 좋은 시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가슴으로 받아 안고 머리로 생각하게 하는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기는 편이지요. 사물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말들을 끌어다 놓아도 그냥 화려한 말잔치 이상이 되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또한 시는 기본적으로 독자의 마음을 흔들어 놓아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은 진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진실과 직면한다는 건 때론 고통을 수반하기도 합니다. 모르면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기는데, 진실을 아는 순간 괴로움이 찾아들지요. 외면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로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외면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진실 쪽으로 내 발걸음을 옮기려면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시는 독자들에게 이런 진실이 있는데, 너는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질문의 방식을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 하는 건 시인마다 다를 테고요. 그걸 그 시인의 개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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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세요.
답변: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없고, 그저 지금처럼 꾸준히 읽고 쓰는 일을 하겠지요. 꾸준함 말고는 제가 내세울 게 없거든요. 지금보다 더 나은, 누가 읽어도 정말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도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면 시와 독자를 연결해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있는 중이고, 가능하면 조만간 청소년 시집을 한 권 더 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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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대표시와 시인 직접 밝힌 시에 대한 소견>
늑대와 칼
박일환
에스키모가 늑대 잡는 법은 이렇다네 얼음 벌판에 피 묻은 칼을 거꾸로 꽂아놓으면 피 냄새를 맡은 늑대가 와서 칼날을 혀로 핥는다는 거야 그러다가 혀를 베고, 자기 혀에서 나온 피를 계속 핥는다는 거지 결국 피가 다 빠져나가 죽은 늑대를 둘러메고 오기만 하면 된다는군
지금, 피 묻은 칼날을 자기 혀로 핥고 있는 늑대는 누굴까? 피 묻은 칼을 꽂아두고 간 자는 언제나 보이지 않고, 피의 향내가 주는 유혹은 강렬해서 자기도 모르게 긴 혓바닥을 내밀곤 하지 탐욕스러운 혓바닥부터 뽑아 버려야 하는데 그럴 수 있어? 낄낄거리며 조롱하는 소리 환청처럼 들려오는 동안에도 칼날 곁을 떠나지 못하는 혓바닥의 저 성실한 노동이라니!
―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
<소견>
노동이 신성하다고 하는 이들의 말을 곧이듣지 마시라. 그렇게 말하는 이들치고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은 드물거니와 대개는 그런 말을 팔아먹으며 산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 성실의 의무 같은 말이 지닌 함정을 조심하시라. 누구를, 무엇을 위한 성실인지 묻는 것부터 하시라. 무엇보다 인간이 욕망덩어리라는 사실을 명심하시라. 내 안에 깃든 욕망이 나를 파멸시킬 수 있다는 걸 가슴에 새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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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평리 양치기
박일환
프랑시스 잠을 사랑하던 사내가
흰 당나귀 대신
양 떼를 몰고 간다
풀이 자라는 산등성이 쪽으로
어린 양이 어미 양을 따르고
다시 그 뒤를 따르는 목자는
한때 시인이었다고 한다
시 대신 한밤중에 새끼 양을 받아내는,
평안도 정주가 고향인
삼수군 관평리의 양치기
-불귀(不歸)로다 내 몸이야 아하 三水甲山 못 벗어난다 아하하*
고향 선배 소월은 일찍 죽었고
소월 대신 삼수에 갇힌 사내는
여든넷, 천수를 누렸다는데
보살핀 양들 덕분이었을까
세상 따위에 지고 말고가 없는
순한 생명들에게서 순응을 배웠을까
아하, 아하하
소월의 탄식 소리 받아안던
관평리 밤하늘
그 아래 잠든 양들 곁으로
가만히 다가와 눕던 사내가 있었다
―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
<소견>
사슴처럼 목이 길었던 백석 시인을 생각한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거라며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겠다던, 마가리 대신 삼수갑산 험준한 산골 협동농장으로 쫓겨가야 했던, 거기서 양을 치며 새끼를 받아내던 불운의 시인을 생각한다. 불귀(不歸)야, 불귀(不歸)야, 불귀(不歸)로다. 돌아오지 못한 시인을 위해 술 한 잔 따라드리고 싶은 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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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춤
박일환
달려야 자동차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나는 멈출 수 있어야 자동차라고 말하겠다
신호등 앞에 얌전히 서 있는 자동차들
정지의 순간이 있어
저 멀리 뻗은 길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가속페달보다 브레이크가 중요하다는 걸
누가 내게 일러 주었던가
앞서간 자동차들도 어디선가는 멈춰 있을 것이다
오로지 달리기만 하는 것들은
필시 파멸의 골목으로 접어들게 될지니
우선멈춤 표지판이 없더라도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게
사랑의 자세라고 나는 우겨보는 것이다
이 시도 여기서 잠시 멈출 테니
나머지 길은 당신이 직접 더듬어 보시라
―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
<소견>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다. 운전을 하다 몇 번 과태료를 문 적이 있는데, 대부분 과속 때문이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 보며, 빨리 도착지에 가서 운전대를 놓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빨리 달린다고 해서 인생이 쾌속 주행을 하는 건 아닐 게다. 누가 좀 말려주었으면 싶은 순간들이 쌓일 때마다 과태료 딱지가 날아들 듯 응보의 시간이 찾아든다. 늘 조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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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박일환
낙지볶음을 낙지복음으로 읽는다
나의 오독을 모독으로 받지 마라
세상의 모든 복음서는
제 몸을 보시한 이들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느니
―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
<소견>
오독의 즐거움을 아시는지? 세상이 던져준 말을 내 것으로 만들자면 우선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내 관점부터 확고히 세울 것. 오류와 오독을 두려워하지 말 것. 다만 건방 떨지는 말 것. 넌지시 내 해석을 들이밀 것. 내 해석을 받아들이고 말고는 내 몫이 아니니, 가만히 웃으며 화답을 기다리는 시간을 즐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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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진 자로 살아가기
박일환
스스로 빛을 꺼버리며 빚을 던져주고 간 당신들
내가 죽을 때까지 다 갚지 못할 게 분명한
그 빚이
나를 살아가게 만듭니다
열심히 살아야 조금이라도 빚을 갚지
그런 마음으로 밥을 먹고
주어진 일을 하고
벗들과 술도 한잔 합니다
기운을 내야 합니다
먼저 간 당신들이 남긴 빚 덕분입니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가겠다던 당신 말씀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럴 리가요
그럴수록 당신은 더 많은 빚을 우리에게 지웠는걸요
여직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게 증거인걸요
빚은 주는 사람 마음이 아니라
받는 사람 마음이라는 걸 깨닫고 있습니다
갚을 빚이 없다는 이들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고 살아왔다고 하는 이들
나는 이제 그런 이들을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도 빚을 남기고 가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감히 그런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오늘도 나는 빚을 갚기 위해 살아갑니다
내가 빚을 갚아야 내가 남길 빚도 조금은 있을 테니까요
이토록 건방진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먼저 간 당신들이 남긴 빚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
<소견>
당신에게 기대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기댈 수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겠습니다. 그럴수록 쌓여 가는 빚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빚을 살아가는 이유로 삼겠습니다. 돌아보면 세상에 빚진 것투성이입니다. 베푼 것보다 받은 것이 크니, 얼마나 열심히 살아야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까요?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여밉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이웃에 대한 연대가 담긴 시집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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