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윤 기자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진길 시인(동명대 교수)이 네 번째 시집 『거미의 협상술』(도서출판 고요아침)을 출간했다. 지난 2016년 세 번째 시집 『화석지대』(지혜 刊)를 출간한 지 7년 만이다.
김 시인은 서문에서 “헛되고 헛된 것을 좇느라, 성찰의 시간을 갖느라 제법 긴 공백이었다”며, “그 공백이 여백이길 바란다”고 고백했다. 시인의 말처럼 본업이 우선이었을 시기에 창작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작품세계가 한층 깊어졌다는 평이 들린다. 대전문화재단이 발간을 지원한 이번 시집에는 천강문학상 수상작 ‘봉홧불을 놓다’와 나래시조문학상 수상작 ‘쌍봉낙타’ 등 70여 편이 수록됐다. 이 가운데 30여 편은 지면에 발표되지 않은 신작이어서 독자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한다.
총 5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1부에서 ‘자화상’, ‘선인장의 기도’ 등 자아 인식 및 성찰에 관한 시편들을, 2부에서는 ‘新 어부사시사’, ‘굴뚝새의 겨울’ 등 역사의식과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배치했다. 3부에서는 ‘정유일기’, ‘우둥불’ 등 국가 및 공동체에 관한 공공의 가치를 생각하는 시편들을, 4부와 5부에서는 진도 죽림마을과 장생포 시편, 그리고 삶의 과제들을 다시 생각해보는 ‘광야’ 등과 같은 작품들을 수록했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임채성 시인은 “김진길 시인은 통합적인 사유를 통해 ‘지금_여기’의 자아를 진단하고, 자아가 추구하는 이상세계를 탐색하며, 성찰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는 변증법적 보법을 펼쳐 보인다.”며, “이러한 서정의 방식은 시인의 인식체계에 포착한 사물과 대상을 통해 개성적인 너비와 깊이의 시조미학을 완성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박명숙 시인은 표사에서 김진길 시인은 시조문단에서 드문 그 만의 고유한 특질과 강점으로 그 입지를 세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시집 속의 「新 어부사시사」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현대시조에 접목시키고 재해석한 심상치 않은 작의를 내비치는 특별한 가작”이라며, “현대시조의 고민의 한 축을 불식시키며, 고금이 만나고 드나드는 작법의 범례를 제시한 이 작품이 창작 현장을 향해 시사하는 바는 아주 고무적이라 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김진길 시인은 31년간 군 생활을 하고 지난해 육군 중령으로 전역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편들 중에는 국가, 공동체, 역사의식 등 공공의 가치를 주제로 한 시편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김 시인이 다루는 주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인간과 환경, 그리고 우주 전반으로까지 확장된다. 이번 시집에는 최근 전남 진도와 울산 장생포에서 레지던시 입주작가로 활동하면서 노래한 바다와 인간의 삶에 관한 시편들도 여러 편 실려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필장筆匠
김진길
살아서는 어찌 못할 야성을 다듬는다
포수가 쏜 탄환이 폐부에서 끓는 사이
한 움큼 아귀에 잡힌 잔 온기를 잘라낸다.
허기는 며칠째 등가죽에 붙었지만
저 붉은 육질 따윈 눈밖에 둔 지 오래
빼쭉 선 터럭만 안고 돌아서는 늦저녁.
두 발을 모아 뛰던 자귀가 저리 저물면
어둠보다 더 캄캄한 먹물 같은 죽음들을
올올이 엮고 엮어서 풀을 먹이는 필장.
빳빳한 저 뚝심도 맥없이 풀리는 날엔
칡넝쿨 마른 생에서 갈필葛筆을 발라내어
뿌리 끝 쓰고 단 맛을 묵향인 듯 두른다.
- 『거미의 협상술』, 고요아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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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낙타
김진길
굵어진 지평선이 자벌레처럼 길을 간다
태양의 낡은 채찍이
온몸을 휘감지만
일정한 쌍봉의 간격은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 한 번 몰아치면 시시로 지워지는 길
나고 자란 땅이건만
사원砂原은 늘 낯설어서
설익은 상념 따위는
쌍봉 안에 넣어둔다.
굽은 제 등을 걷는
능선 위의 낙타행렬
잣눈 달린 보폭은
자신을 재단하는 것,
밤마다 푸른 찬사가 별똥별로 쏟아진다.
- 『거미의 협상술』, 고요아침,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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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어부사시사
김진길
그물코 다 기웠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샛바람 잦아드니 갈앉은 배꾼 근심
잔 너울 가볍게 살랑 봄 햇살을 싣고 가자.
바닷길은 한길이라 고향으로 나 있다며
비릿한 향수병에 배를 탄 이국 청년
저녁답 찬 노을빛에 서툰 말은 얼붙고.
몸덩이만 성하다면 노동요는 만국 공용
이어라 이어라 지국총 어사와*
저 깊은 바닷속으로 꿈을 얽어 던진다.
돛 디여라 돛 디여라** 저 큰 달 어찌 싣나
그물은 숭숭하여 다 흘러도 만선이니
별빛을 총총 알 박은 이 바다는 두고 가자.
닫 디여라 닫 디여라*** 하마 날이 밝는다
간밤에 미끄덩 빠진 그달은 그만 잊고
파다닥 튀는 활어의 짧은 해를 묵상하자.
어창 문 어서 닫자 뭍의 근심 숨어들라
마중나온 소주잔에 알큰하게 오른 취기
입 풀린 안남 청년****이 제 바다를 한 짐 푼다.
* 윤선도의 『어부사시사』에서 차용. 노 젓는 소리
** 돛 내려라 돛 내려라
*** 닻 내려라 닻 내려라
***** 베트남 청년
- 『거미의 협상술』, 고요아침, 2023.
김진길 시인의 네 번째 시조집 『거미의 협상술』 열린시학정형시집으로 발간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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