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 집은 어디인가
이승희
밤에도 낮에도 풀만 뜯어먹었다 풀 먹고 풀 먹고 밤이 오고 다시 풀 먹고 풀 먹고 낮이 오는 동안 건너편 철조망 너머에선 풀이 자라고 여기에선 양들이 자란다 그 사이 철조망은 또 길어지고 양은 양을 피해 간다 어제가 그렇고 오늘이 그렇다 대체로 여기는 그런 세계다 오늘이 끝없이 이어져서 내일이 오지 않는 그런 날씨 간혹 비가 와서 좋다고 말하는 건 우리가 미처 나눠 갖지 못한 약속의 말이지만 다 흘러나가는 이야기 그렇게 철조망 안에서 늙어 가는 동안 산에는 꽃이 피고 구름이 있었지만 사는 일은 한 발 한 발 폐허를 더 폐허스럽게 가꾸는 일이었다 잘 있느냐고 누가 물어주었다면 나는 그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말해주었다면 구름이면 어떠냐고 그런 표정을 지었을 텐데 모두 철조망 너머에서 바라보다 떠나갔다 내 이름이 양이라 너의 이름도 양 혹은 양이 아닌 모든 것 길을 잃을 수 없는 거리가 이 세계의 거리라면 길은 없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개가 짖지 않아도 우리는 착한 양이니까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아도 그럴 걸 아니까 안간힘 그런 거 말고 서로를 목격하면서 그게 오늘이라고 믿는 것이니까
― 『49가지 시 쓰기 상상 테마』, 더푸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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