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03년 《현대시》로 등단한 고영 시인이 네 번째 시집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를 시인동네시인선으로 출간했다. 이 시집은 겨울철에 읽기에 좋은 특별함을 가졌다. 이별이 갖는 의미를 남다르게, 따뜻하게 탐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는 ‘아무 관계도 아닌 모든 관계’가 되어버린 한 사람을 떠나보내며 마지막까지 함께한 투병기인 동시에 시로 쓴 헌사이며, 영원히 부재중일 한 사람을 다시 살려내려는 고투의 흔적이다. 혹자는 순애보라고 했고, 혹자는 희생이라고 했고, 혹자는 미친 짓이라고 했던, 그 아름답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이 한 권의 시집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난 뒤, 6년여가 지나서야 고영 시인의 입에서 그녀와의 관계에 대해 겨우, 말이, 흘러나온다. “보호자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관여자일 수밖에 없었던 그런” 관계였다고. 말할 수 없었던 지난 시절을 침묵의 시간이라 한다면, 고영 시인의 현재는 침묵과 대화하는 시간이다.
고영 시인의 시집 해설을 쓴 오민석 단국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모든 전말이었던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서 그 사람을 살려내는 이야기이고 살려내도 여전히 부재하는 그 사람을 다시 떠나보내는 이야기”이며 “용납할 수 없는 부재를 용납해야 하는, 터무니없는 현실에 대한 터무니 있는 이야기”라고 이 시집을 정의했다.
그렇다, 이별을 경험한 사람은 그 이별을 견디며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낸 사람은 그 죽음의 부재를 심장에 안고 이별의 후경으로 내내 현존한다. 만약, 견딘다면 부재의 고통을 스스로 해소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망각이다. 하지만 고영 시인은 망각하지 않고 이 시집 속에 한 사람을 오롯이 살려낸다.
살려낸다는 것은 고영만의 특별한 영역을 만드는 일이다.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영역, 우리는 이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고, 연대라고 불러도 좋다. 그래서 우리는 고영이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를 통해 우리에게 던져준 ‘사랑’ 혹은 ‘연대’ 앞에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어지는 간절함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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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무중력
고영
꿈결에 나는 누군가의 온화한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 목소리는 분명 실체를 가진 형상이었는데
새벽닭이 울자
홀연 사라져 버렸다.
지겨운 중력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한 사람의 영혼이
새삼 지상이 그리워서 내 몸을 빌렸구나,
상투적으로 추측하고
상투적으로 아침을 먹었다.
눈에 가득 들어차 있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흘려보냈던 문장들의 상실감에 대해
생각했다.
한 사람이 남긴 고통에 다다르기까지
나는 일관되게
불면이었으며 불운했다.
예고하고 찾아오는 슬픔이 두려웠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형상을 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오래전에 종적을 감췄던
내 귓속의 유령이
다시
나타났다.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시인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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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고영
아주 평화롭게
식탁 위에 접시가 놓여 있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접시 속에 살던 새 한 마리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접시 속에서 혼자 살던 새마저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집을 나간 것이라고
도리어
미안해했다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시인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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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력
고영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신은 의자에 잠겨 있었다. 의자 속에 무덤을 파고 부장품이 되어버릴 시를 쓰고 있었다.
훗날의 시집이었다.
요람에서부터 이미 늙어버린 당신에게서
소녀를 꺼내야 했다. 하지만 소녀는 고집스러웠고 집요했으며 과거형이었고,
결정적으로
의자를 너무 사랑했다.
그랬다. 의자는 믿을 수 없는 세포로 이루어진 유기체였다.
우물보다 깊고
신앙보다 더 간절한 세계에서 당신을
꺼내주고 싶었다.
무언가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땐
나는 이미 늦어버린 것
한 번만 알아 달라는 말을
한 번만 안아 달라는 말로 오인(誤認)하며
손도 잡기도 전에 가슴을 먼저 만졌다. 차가웠다. 썩어 문드러진 소녀의 심장이 묻어났다.
우리는 끝내 관계를 맺지 못했다.
―『당신은 나의 모든 전말이다』, 시인동네,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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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말이라는 당신이 이 세상에 있거나 없거나, 한결같이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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