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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은기 시인, 첫 시집 16년 만에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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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5. 1. 11.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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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가 내포한 진한 서정과 직관적 고백

 

 

하린 기자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새로움으로 독자와의 신선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심사위원: 정호승 시인, 이숭원 문학평론가, 이문재 시인)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정은기 시인이 첫 시집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를 걷는사람시인선으로 발간했다.

 

무려 16년 만이다. 일찍이 등단작을 통해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차창 밖, 풍경의 빈곳)라고 쓰며 삶의 고단함을 환유했던 정은기 시인. 그의 첫 시집은 그 세월만큼 꾹꾹 눌러쓴 고백으로 울울하다. “이쪽으로 가라고 외치기보단 가만히 서서 방향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당선 소감) 작품을 쓰겠다고 했던 바람처럼, 정은기의 시는 고백의 반복과 지속을 통해 결국 타인의 내면을 마주하는 윤리적 행위로까지 확장된다.

 

일상의 삶은 치열한 갈등과 욕망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시인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으려는 정은기 시인의 몸부림은 내밀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서로에게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조금 더 멀리까지 사랑하는 일은 달빛 아래에서만 가능한 일”(삔이 그랬다)이라고 하며, 일상과 욕망, 사랑이 갖는 본질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해설을 쓴 남승원 평론가는 정은기에게는 끊임없이 고백이 이어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시 쓰기를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형식과 구조를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또한 거듭되는 고백은, 그의 바람대로, 분리되어 왔던 화자와 청자의 오랜 장벽을 허물고, 타인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공유하는 지점으로 나아가게될 것이라며 이 시집이 지닌 미덕을 제시했다.

 

추천사를 쓴 박정대 시인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물의 움직임을 면밀히 살피는 적막 관찰자의 시선으로정은기의 시가 존재한다고 평하며 드러냄을 통해 감추고 감춤을 통해 드러내는발성법을 통해 그만의 시적 무늬를 펼쳐내고 있다고, 창작 방법론 측면의 특징을 언술했다.

 

시는 기본적으로 고백을 토대로 한 장르다. 문제는 그 고백이 얼마나 독자들에게 공감과 실감을 안겨주면서 미학적 파장과 울림, 떨림을 동반하고 있느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에 나타난 고백은 유효하다. 등단 16년 만에 타자와 독자에게 건네고 있는 정은기 만의 섬세한 고백에 귀가 슬쩍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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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사물의 방향

 

정은기

 

십자가의 뒤편은 얼마나 어두울까

모든 성상에는 방향이 명확하다

 

십자가 뒤에서 어두운 얼굴로 포도주를 마신다

오늘은 정식으로 고아가 되는 날

 

(중략)

 

바람에 날리는 상복과 흰 붕대,

건널목을 건너는 부러진 목,

 

삶과 죽음을 넘어설 만한 상상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돌멩이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죽거나

돌멩이로 태어나서 돌멩이로 죽는다

 

나무만 방향이 없어서

조금 더 평화로운 얼굴이었다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걷는사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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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운 결론

 

정은기

 

신부가 되고 싶은 적이 있었다 성당 뒤편 사제관의 미국인 신부는 우리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나는 진돗개가 좋았지만 사제관에는 셰퍼드가 목줄도 없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려움은 믿음이 약한 자들의 것이었기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셰퍼드의 목덜미를 쓸어내리곤 했다 그렇게 하기까지 나는 셰퍼드를 만질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수없이 기도했다 어쩌면 내가 신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미국에서 온 셰퍼드를 길들이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산 밑 저수지에서 친구 몇이 빠져 죽었다 얼음이 깨지면서 저수지는 사나워졌다 얼음 밑으로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는 친구는 며칠 동안 성당에 나오지 않았다 누구도 날뛰는 저수지를 길들이지 못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연애를 시작한 형과 누나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지만 나에게 그럴 만한 용기가 없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걷는사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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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탓

 

정은기

 

눈물이 부쩍 많아졌어요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하늘은 더 밝아집니다 기분 탓이죠 일이 풀리지 않을 땐

돌아앉아 사물의 그림자에 몰두합니다

 

초원을 달리는 개들은 점점 사나워졌습니다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개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림자 속에서 우리의 걱정은 얇은 종이가 됩니다

 

말하는 방법을 잊을 것 같아서 둥근 식탁에 둘러앉아 오늘의 대화를 남겨 두었습니다

조금은 싱거운 미역국처럼 우리는 매번 목적지를 바꾸어 가며 환승합니다 승차권처럼,

 

세수하는 얼굴은 오늘의 방향을 묻습니다

버스는 방금 전에 출발했고요 우리의 대화는 아직 정차중입니다

 

어디쯤에서 만날까요 눈물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방파제가 되고 있는 중입니다

 

뒤통수는 얼굴로부터 너무 먼 곳에 누워 있습니다 나의 등을 거쳐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그리움은 계속해서 반환점을 돌고 있어요

 

우리는 여전히 정체 중입니다 점점 멀어지면서 결국에는 만나겠지요

어디쯤에서 기다릴까요

나라는 복수

복수의 나는,

 

그림자 속에서만 우리는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적이 되기 전까지만 사랑을 한다, 걷는사람,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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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 기자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새로움”으로 “독자와의 신선한 대화”를 하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심사위원: 정호승 시인, 이숭원 문학평론가, 이문재 시인) 2008년 한국일보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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