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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와 불운의 배낭을 메고 독자적이고 매력적인 시의 길을 걸어가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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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5. 1. 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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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의 아홉 번째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가 타이피스트시인선으로 출간

 

 

하린 기자

 

김이듬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가 타이피스트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2001년 데뷔 이후 한국 시단에서 기성의 부조리에 저항하면서도 명랑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변방의 존재들을 위무하는 시 세계를 구축해 왔던 시인은 매 시집마다 불손한 감각과 아름다운 언어로 독창적이고 유려한 세계를 선보였다. 한편 김이듬 시인은 잘 알려진 대로 2020히스테리아의 영미 번역본으로 전미번역상과 루시엔스트릭번역상을 동시 수상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바가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파쇄한 백지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길 위에 서 있는 듯한 양상을 띤다. 안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얼어붙은 길목 앞에서 비애와 불운의 배낭을 메고 길을 떠나는 자가 된다. 이 고독은 세상과 엇물리는 자의 일방통행으로 읽힌다. 그 일방통행 안에서 시인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새로운 시와 사랑을 발견해 나간다. 제자리도 기원도 없이, 누구에게도 사랑받거나 이해받지 못했던 화자가 영원의 동행을 하듯,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발걸음을 끊임없이 옮긴다.

 

김이듬의 시에 나오는 화자에겐 게 허락된 안식처는 없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서 돌아갈 스위트 홈의 불빛이 안 보인다. 지향점도 경향도 없이 지금여기를 그때그때의 목소리로 쓰고 있는 시인. “내겐 제자리도 기원도 없다.”(크래시 랜딩)고 말하며 자신만의 기원을 찾아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길을 떠나는 시인. 이것이 김이듬의 시가 낳는 근본 감정이자 생래적 감각이다.

 

그러한 특징 때문에 추천사를 쓴 김연덕 시인은 더는 안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길목 앞에 시인은 서 있다. 그는 한때 길 안쪽에 머물렀고, 그 안에서 오래전 길 바깥으로 사라져 버린 이를 떠올리기도 했으며, 엽서를 받거나 보내는 사이 자신이 서 있는 깊고 뾰족한 길목에 대해, 동시에 너무 뜨겁거나 너무 차가워 세상과 엇물리는 자신의 몸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다고 언술했다.

 

김이듬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비천하고 아름다운 삶의 자리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 만남은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김이듬 시인이 지금껏 걸어온, 앞으로도 걸어갈 매혹과 참혹의 세계를 미학적으로 호흡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를 읽어볼 일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블랙 아이스

 

김이듬

 

눈발은 눈이었을 때 아름답다

쌓인 눈이 눈석임물 되었다가 얼어붙으면 가장 위험하다

 

눈이 그쳤는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설원이 녹고 있다

도로와 개펄이 드러난다

항구 기능을 상실한 저 월곶 포구에는 아침 어시장이 열릴 것이다

 

아침, , 엄마

에밀리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도 좋아한다

 

엄마 빼고는 여기 다 있다

 

에밀리는 기지개 켜다 말고 베개를 껴안으며 말한다

오늘은 찾을 수 있겠지?

나랑 닮았겠지?

죽진 않았겠지?”

 

이 친구는 포틀랜드에서 입양 기록 갖고

엄마 찾으러 한국에 왔다

 

어제는 에밀리가 내민 지번 주소 들고 그의 부모 댁을 찾아갔지만

삼미시장으로 변한 거리만 확인했을 뿐

우리는 40여 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한국에 온 에밀리와 난생처음 시흥에 온 나는

을씨년스러운 시내를 온종일 돌아다녔다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한 건 마전저수지 사거리에서

에밀리가 양팔을 벌린 채 돌다가 웃다가 넘어진 건 해가 질 무렵

 

히죽거리며 말하지 마, 에밀리!”

그럼 울어야 되겠어?”

 

뜨거운 물에 빨아 널어 둔 장갑은 수축되어 작고

어제 입었던 스웨터는 여태 축축하다

작년에 룸메이트가 던진 말이 떠오른다

실수로 놓고 가는 줄 알고 챙겨 준 물건들이었다

버리기는 그렇고...... 너 가져

갖기 싫으면 버려 줘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희고 부드러운 눈발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

 

철이 들어 나의 엄마를 찾아갔을 때

엄마는 새엄마보다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딸을 버리고도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미끄러운 길이 펼쳐져 있다

눈이 그쳐서 더 추울 거야

장갑도 껴

눈길보다 살얼음판이 더 위험해

 

에밀리가 태어난 곳을 향해 간다

생후 8개월 동안 살았던 곳을 향해 춤을 추듯 걷는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모텔 주차장에서 나오던 검은 승용차가

반 바퀴 돌며 도로를 벗어난다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 물어봐서 뭐 할까

 

범인을 잡는 데 회의적인 소설 속 형사는 이해가 되지만

회의적인 가이드이자 친구로서의 나는 우리의 행방을 모르겠다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

 

만나 봐야 좋을 게 없을지라도

한 번 더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아피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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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엔 명작을 쓰지

 

김이듬

 

극장에서 돌아와 글을 써요 나는 지저분하며 조그마한 구역에 살아요 항상 떠날 궁리를 하죠 안정감이 밤물결 소리를 내면 떠나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요 나를 여기 데려다 놓고 데리러 오지 않는 사람이 혹시나 들를지도 몰라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합니다

방 모서리엔 낡은 회색 슬리핑 백이 있어요 오늘은 자지 않고 명작을 써요 반투명한 해파리처럼 생긴 전등을 켜요 미안하지만 당신을 위로하러 글을 쓰진 않아요 이어링을 만지작거리며 명작을 써요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은밀하고 거칠며 쓰라린 글쓰기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죠

그렇습니다 맞은편 복도로 햇살이 파도처럼 밀려오죠 나는 밤새 책상을 부여잡고 표류한 셈이죠 그게 제 역할 같아요 나는 어떤 게 명작인 줄 몰라요 맥베스 세트장에서 내게 말했죠 그래도 너는 순정을 가졌잖니 대표님 순정부품 같은 말씀 마세요 너무 비싸거든요 눈을 뜨면 나는 조그마한 구역의 무대 뒤에서 뜨거운 조명을 만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아피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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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하러 왔어

 

김이듬

 

내가 마지막으로 팔았던 책은 알베르투의 시집. 알베르투는 시가 자신이 혼자 있는 방식이라고 했지. 수십 개의 필명을 가졌던 시인. 그는 자신을 타이르다가 그렇게 많은 사람이 되었을까.

 

새 세입자가 들어와야 책방을 뺄 수 있었어. 건물주가 그랬어.내가 새 세입자를 찾아야 전세금을 돌려줄 수 있다고 했지. 착하고 순진해 보이는 신혼부부가 책방을 보러 왔어. 그들은 빵집을 열고 싶다고 했어. 제빵사 자격증이 있는 남자는 빵을 만들고 여자는 빵을 팔며 단란하게 살고 싶다고 했어.

나는 덫에 걸려든 산양을 본 사냥꾼처럼 들뜨고 흥분했지. 호수와 숲도 바라보이는 목 좋은 자리라며 거짓말했어. 주민들이 영혼의 양식은 사지 않아도 맛있는 빵은 사 먹을 거라고 낙관한 건 사실이야.

 

인사하러 왔어. 내가 두고 간 나 자신을 찾으러 온 건 아니야. 정말이야. 새 세입자 부부에게 인사하며 선물도 건네고 네가 좋아하는 카눌레도 살 생각이었지. 버스로 한 시간 거리. 환승하는 정류장 가까이 대형 마트에 들러 양말 세트를 사서 나오려는데 보안 요원이 한 여인에게 가방을 열어 보라며 추궁하고 있더라. 나는 도둑처럼 두근거렸다.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겠어? 임대 중이라고 적힌 종이가 유리창을 거의 다 가리고 있다. 아등바등 버텼을 어린 부부는 얼마나 나를 원망했을까. 내가 물려줬던 커다란 스테인리스 테이블이 밖으로 나와 있더라.

 

인사하러 왔어. 책방을 운영할 때 거의 매일 갔던 편의점 직원에게. 그는 내게 김밥, 우유, 샌드위치를 무료로 주곤 했지. 유통기한을 막 넘긴 음식이었지만 나는 그걸 먹고 탈 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편의점은 편의점인데 계열사가 바뀌었대. 모르는 직원이 고용주에게 잔소리를 듣고 있더라.

 

건널목 건너면 호수공원이다. 사람들은 어디서 책을 사고 어디서 빵을 사는 걸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공원으로 산책 가는 주말.

 

이 동네엔 웬일로 왔는지 길 가던 시인이 내게 묻는다. 일산엔 작가가 반려동물만큼 많다잖아. 책방 접었다는 소식은 들었다고 다시 책방을 열면 그땐 자신도 책을 사러 가겠다고 한다. 설날 열차표 끊었는지 내게 묻는다. 자칫 늦으면 역방향 좌석밖에 없을 거라고 한다. 나는 고개만 끄덕거렸어. 역방향으로 가도 고향에 도착할 거라는 멋진 말을 덧붙인다. 시인은 혼자만 떠든 것을 밤에 후회하겠지. 혼자 있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개를 보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자고 한다.

 

광장이야. 유기견들을 맡아서 분양하고 있는 천막 아래야. 아기 같은데 노견이라고 하네. 나도 젊어 보인다는 말을 가끔 듣잖아. 주인이랍시고 아무 이름이나 붙여 주겠지. 네 반려견 이름이 카눌레 맞지? 아무도 안 데려가면 안락사. 너도 어렸을 땐 안락사가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 품에 안겨 죽는 건 줄 알았니?

 

고양이가 내 손등에 발을 댄 채 나를 쳐다본다. 멸종 위기 어린 호랑이라면 이런 무늬를 가지고 있겠다. 고양이도 분양해요? 여자애예요? 이름이 뭐예요?

 

시인이 관심을 보인다, 인사만 할 거면서.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아피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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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와 불운의 배낭을 메고 독자적이고 매력적인 시의 길을 걸어가는 시인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김이듬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가 타이피스트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2001년 데뷔 이후 한국 시단에서 기성의 부조리에 저항하면서도 명랑하고 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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