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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근원을 담아낸 처절한 시적 언어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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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5. 3. 7.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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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걷는 사람 출판사에서 복간

 

 

 

하린 기자

 

오래전 절판되어 더는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우리 시대 대표 시집을 선보이는 걷는사람 다시의 열두 번째 시리즈로 이승하의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가 복간되었다. 이승하 시인은 1984중앙일보신춘문예에 시가, 1989경향신문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고통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심열을 기울여 왔다.

 

이승하 시인이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에서 그려낸 시 세계는 한 생애의 기저에서부터 고요히, 그러나 치열하게 끌어 오르는 청춘의 결기와 같다. 이곳을 표상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를 고른다면, 몸은 지상에 있지만 영혼은 천상을 떠도는 누이동생과 불면을 앓는 오빠가 이루어내는 청춘의 방황일 것이다. 폭력과 광기의 날을 살아가면서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라는 사실과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 주는 끈은 없”(바람 그리기)다는 쓰라린 자각을 끌어안은 채, 질병과 죽음의 고통스러운 민낯을 오롯이 마주하는 시인의 인물들은 언뜻 불행해 보일지 모르나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기어코 생을 견디어낸다.

 

마음 한구석이 부서져 내릴지라도 앞을 향해 내딛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는 굳센 마음으로 가득한 이 시집은 마치 서글픈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기체를 연상케 한다. “나는 더 자라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라고 적막하게 울부짖는 화자가 영혼 병든 누이의/ 남은 생을 돌보아 줄 곳을 찾아떠난 성분도(聖芬道)에서 뿌리 없는 어린 풀잎들가지 꺾인 어린 나무들”(성분도 직업재활원에서)을 발견하는 풍경으로부터 메아리치는 애달픈 희망이 눈부시듯이.

 

박혜경 문학평론가가 주목하듯, 이승하의 시집에 드러나는 아버지와의 싸움은 시인을 억누르는 기성 사회의 세속화된 가치관과의 절망적이고도 절박한 싸움이다. 가족이 주는 상처는 다른 누가 주는 상처보다 깊”(길 위에서의 약속)기에 가장 미운 사람을 가장 많이 닮”(통나무)고야 마는 냉혹한 아이러니로 가득한 세계를 바탕으로, 시인 이승하는 가족 관계에 기인한 불화와 절망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세계에 잔재하는 고통은 벌()이 아님을, 누구나 영혼 가장 은밀한 곳에”(정신병동 시화전 1) 저마다의 불행을 부둥켜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진실을 다시금 우리에게 일러 주는 것이다. 그러니 조화로운 것과 조화롭지 못한 것이/성한 것과 성하지 않은 것이 모여”(정신병동 시화전 3) 조화를 이루어내는 풍경에서 시작되는 찬란함이 어떻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해설을 쓴 이광호 문학평론가는 구체적이고 예리하며 더욱 처절한 시적 언어를 눈여겨보면서 타인의 저미는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이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이란 정말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날카롭게 짚어낸다. 최동호 문학평론가는 이승하의 시에 드러나는 더없이 순수한 죽음, 사람들과의 아름다운 관계 맺음이 부재하는 약속 없는 세대의 절망적인 목소리에 집중하며, 이승하의 작업이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앓고 있는 광기와 폭력에 대한 하나의 치유 방법이 되리라는 희망을 포착한다. 2025년 봄날 이 시집을 펼친다면 끝내 발목을 묶는 고통의 근원에 육박하고자 하는 시인의 용기와 시 세계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두 살 아래 내 누이야 오락가락하지 말고 나를 봐

작은오빠는 통나무란다 맞아도 맞아도

아프지 않아 아프면 어때 뒤죽박죽인 낮과 밤

싸우는 소리 환청으로 들려오던 계단 밑 방

나는 더 자라야 한다 건강해야 한다.

—「통나무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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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거라. 나는 되기 싫었다. 양수 속에서 동그랗게 잠들었을 때가 좋았다.

교련 시간마다 땡볕 아래서 목총을 들고 16개 동작을 익히느니

16세의 나이로 학교를 그만 다니겠다. 나는 마침내 제안한다.

나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저 애가 아무래도 돌았나 봐. 나는 자연 도태될까?

굴렁쇠가 되어 굴러가고 싶어. 멀리, 아주 먼 도시의 습한 뒷골목으로.

—「병원에서 쓴 일기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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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나무는 저만 괴롭다

다른 나무는 꿈꾸지 않으므로

꿈꿀지라도 아주 다른 꿈이므로

 

그 괴로움이 쌓이고 쌓이면 상실의 시간이 오리

혹은 단절의 시간 혹은 순례의 시간이

버려졌으므로 우리는 떠나야 했다

억압의 장벽을 우회하여

혈연의 철조망을 통과하여

퇴원할 수 있을까 퇴원한 이후로도 우리는

땅을 보며 걸어 다녀야 하리

헤쳐 나가야 할 사회는 거대한 그물 속

우리는 그물에 갇혀 그물 바깥을 꿈꾸었고

그물의 밖은 결국 병원 안이었다

—「정신병동 시화전 3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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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목숨 제때 거두어들이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워 눈물겨우냐

기쁨과 슬픔의 끄트머리가 만나는 일은

얼마나 눈물겨워 아름다우냐

산 사람 위로 내리는 어둠은 어쩜 이렇게 무거운지

창밖에는 별들이 몰려들고

수천 광년 밖의 별들이 떨고

이제 너와 나 사이에는 절차만이 남아 있다

식어 가는 이 행성에 묻는, 묻혀야 하는.

—「병실에서의 죽음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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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근원을 담아낸 처절한 시적 언어의 향연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오래전 절판되어 더는 서점에서 찾을 수 없었던 우리 시대 대표 시집을 선보이는 걷는사람 ‘다시’의 열두 번째 시리즈로 이승하의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가 복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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