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 기자
2025년 제26회 현대시작품상 수상자로 허연 시인이 결정되었다. 수상작은 「판교」 외 9편이다.
허연 시인은 1991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등단한 후 그동안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오십미터』,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등과 산문집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고전 여행자의 책』 등을 발간하였고, 현대문학상, 한국출판학술상, 김종철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허연 시인의 시는 시대적 징후로서 나타나는 젊은 날의 상처와 불안 속에서 시적 연륜(年輪)을 쌓아가면서도, 끝내 바깥의 선 아웃사이더의 냉소적 시선을 놓지 않는 시적 일관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의 시적 태도는 삶의 좌절 이후에도 주저앉지 않고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연주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의 시는 죽음에서 비롯되는 사유와 감정과 언어를 조금씩 빛깔을 달리하며 진화해 왔으며, 이 젊은 날의 불온성은 인간의 실존적 위상을 묘파하는 존재론적 시학으로 전이되었다.
심사를 오형엽(문학평론가 · 고려대 교수), 김언(시인 · 서울예대 교수), 박혜진(문학평론가), 양순모(문학평론가)가 맡아서 진행했다.
심사평 일부를 소개한다.
“허연 시인은 『불온한 검은 피』(1995)에서 자기와의 불화 속에서 빚어진 불온함의 시적 증상을 불협화음의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이 증상은 젊은 날의 상처와 불안을 시대적 징후로 묘사함으로써 개인의 영역과 사회의 영역을 횡단하는 정신적 비명(悲鳴)이었다. 두 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2008) 이후 다섯 번째 시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2020)에 이르기까지 젊은 날의 불온성은 우울의 옷을 입고 성숙해 갔지만 ‘불온한 검은 피’의 내면적 동력은 인간의 실존적 위상을 묘파하는 존재론적 시학으로 전이되었다.”(오형엽 평론가)
“죽음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한 시인의 시가 수십 년 세월이 지나서도 죽음을 놓지 않는 시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죽음이 삶의 조건이라는 명제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청년이 중년을 지나 장년과 노년의 시기에 접어들어서도, 죽음을 근거로 해서 나온 시는 여전히 죽음을 터전으로 삼아 나온다. 삼십 년 넘게 시력을 쌓아온 허연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죽음에서 비롯되는 사유와 감정과 언어가 조금씩 빛깔을 달리하며 진화해왔으나 죽음을 축으로 삼아 작동하는 시의 원리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김언 시인)
“세속적이되 속물적이지 않고 미학적이되 난해하지 않은 허연의 시가 오랜 시간 입에서 입으로, 손에서 손으로,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클래식으로 자리잡아 가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그토록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시가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연주하는 악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장면을 포착하고 그 장면에서 오래된 감정을 불어낼 때, 우리는 예의 그 ‘제3의 태도’로 운명이라는 짐과 삶이라는 무게에서 해방되며 자유를 감각한다. 도저한 허무주의에의 절망을 사랑이라는 힘으로 변화할 수 있는 힘이 허연에게서는 지칠 줄 모르고 나타나는 것 같다.”(박혜진 평론가)
“그의 아버지가 건네준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우리는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판교」)라 말하는 시인이 있다면, 얘기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삶에의 좌절 후에 어른 김장하가 더욱 감동적인 것으로 찾아오듯, 우리 시단에의 좌절이 깊어질수록 새로운 어른의 자리는 보다 간절해지는 것 같다. 나는 허연 시인이 젊은 시인들에게 나쁜 어른(좋은 어른)이 되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양순모 평론가)
<현대시작품상>은 월간 《현대시》가 제정하여 운영하는 상으로 2000년 제1회 김혜순 시인을 수상자로 선정한 후 최고의 시인들을 수상자로 배출함으로써 최정상의 시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우리 시를 더욱 심층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세대별로 총 8명의 후보를 선정하여 대표작 5편씩을 2, 3월호에 걸쳐 본심 추천작으로 발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최종 수상자를 결정한다. 올해 시상식은 7월에 열릴 예정이며, 자세한 수상 경위 및 심사평은 월간 《현대시》 5월호에 게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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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일부 소개>
판교
허연
거의 모든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아버지가
삼십 퍼센트 남았다는 심폐기능을 다 바쳐
성당 마당을 쓸고 있었다
“차라리 안 들리니까 더 좋아. 성령 말씀만 들으면 되지”
그렇게 남의 말 안 들으시더니
뜻대로 된 것이다
먼발치에 차를 세워 놓고
빗자루질 하는 아버지를 봤다
빗자루보다 더 말라버린 아버지가
시성諡聖되지 못한
동판교의 성자로 보였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나를 가르쳤던 아버지는
정작 본인은 참지 않으셨다
풍파와 연정, 불운
이런 것들이 아버지의 구십 성상을 할퀴었고
이제 그는 갑자기 성자가 되어 있다
그의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가 취해서 불렀던 노래들은 다 어디로 가서
부질없는 삶과 죽음의 지층으로 들어갔을까
그대가 죽고 내가 살아서 그 노래들을 부를까
아버지는 나보고
왜 젓가락처럼 자꾸 마르냐며
성질머리 좀 고치라고 했다
속으로는
다 당신에게 물려받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성자가 된 아버지께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초개인주의자 천지인 집안 내력상
아버지는 낡은 임대아파트에서 외롭게 죽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구속된 적이 있었다.
출소하는 날 아버지는 내게
칫솔대로 깎은 성모상을 쥐어줬다
그날 아버지는 평생 물려 줄 전부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사라질 것이다
나는 남아서
칫솔대에 성모상을 새기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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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검고 애인은 웃는다
허연
용서는 해뜨기 전에 하는 거라서
이불과 아파트를 빠져나와
강으로 갔다
강의 싸늘함을 보다가
내게 견인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교각 위로 무개화차가 지나갔다
강가에서의 마음은
가슴을 치며 삼월에 대해 쓰거나
이상한 용기를 내서
애인과 헤어지고 싶었다
불현듯
애인은 애인이 아닌 것 같다
사랑도 사랑이 아닌 것 같다
우리가 하는 일은
뼈 속으로 길을 내는 일인 것 같다
청하는 것보다 많이 주었지만
우리는 늘 적다
얼굴이 안 보이고
심장은 가끔씩 느려지고
단지 시를 낳았다
지난겨울은
멀리서 온 나쁜 소문처럼
아무 확신이 없었고
가엾게도
셀 수 없이 많은
희한한 초안들이 만들어졌다.
애인은
혼자가 돼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만날 때 성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나는
회청색 새들이
수 세기 동안 그래왔듯이 그날 그날의 근심을 퍼뜨릴 것이다
시는 검고
애인은 웃고
우리는 달성될 것이다
어떤 날씨와 어떤 날씨의
교체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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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과 공터
허연
진저리가 날 만큼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작약은 피었다
갈빗집 뒤편 숨은 공터
죽은 참새 사체 옆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아이의 허기만큼이나 빠르게 왔다 사라지는 계절
작약은
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책임을 진다
공터 밖으로 전해지면 너무나 평범해져 버리는 고요 때문에
작약과 나는
가지고 있던 것들을 여기 내려놓았다
작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슬프고 수줍어서 한층 더 작약이었다.
2025년 제26회 허연 시인 수상 < 현장+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2025년 제26회 허연 시인 수상 - 미디어 시in
하린 시인 2025년 제26회 현대시작품상 수상자로 허연 시인이 결정되었다. 수상작은 「판교」 외 9편이다. 허연 시인은 1991년 『현대시세계』를 통해 등단한 후 그동안 시집 『불온한 검은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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