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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고통을 섬세한 시적 언어로 끌어안는 치유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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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5. 5. 23.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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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하의 첫 번째 시집 합정에는 우물이 없고 당산에는 당신이 없다를 더푸른시인선으로 발간

 

 

하린 기자

 

2016문학나무신인상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남하 시인이 첫 번째 시집 합정에는 우물이 없고 당산에는 당신이 없다를 더푸른시인선 005번으로 발간했다.

 

황남하는 등단 이래 대상과 화자가 가진 결핍과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면서 그것을 섬세하게 읽어내고 따뜻하게 보듬는 작업을 해 왔다. 결핍과 고통 앞에 황남하 시 속 화자는 흥분하거나 분노하거나 자학하거나 자책도 하지 않는다. 격양된 목소리로 결핍과 고통을 바라본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라지거나 달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핍과 고통이 가져온 상황을 예리한 눈으로 직시하고, 그것이 갖는 본질성을 간파한 후 어린애 달래듯이 조곤조곤 본질성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황남하의 시 쓰기 방식이다. ‘흥분하면 지는 거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감응력이 뛰어난 화자가 직면한 상황을 침착하게 언술한다.

 

그러한 특징을 간파한 신수진 평론가는 상실이라는 사건에 직면한 자아가 시적 언어로써 대상과 교섭하고 나아가 세계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지점의 시 쓰기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런 지향적 태도에는 시인이 가진 모성적 태도가 반영되어 있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듯이 언 땅을 뚫고 새잎이 나오듯이 시적 자아는 모성성을 통해 생명의 경이를 깨닫고 직면한 상황을 큰 품에 안아 아우른다.

 

황남하 시는 근원적으로 따뜻하다. 그런데 무작정 따뜻한 시가 아니라 결핍과 고통이 갖는 실상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이 갖는 몸짓과 양태를 섬세한 시선으로 읽어내서, 모성성이 가득한 언어로 끌어안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다.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냥 잊으라고 말하는 건 임시방편일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함께 아파하고 들어주며 쏟아내게 한 후 펑펑 우는 마음까지도 따뜻한 가슴으로 안아주어야 치유가 된다. 그러한 감응력과 따뜻함으로 위로를 건네는 것이 황남하의 시의 본질이다. 그로 인해 황남하 시집을 읽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진심이 담긴 따뜻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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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 시 맛보기>

 

합정에는 우물이 없고 당산에는 당신이 없다

 

황남하

 

어둠을 빠져나와

전철은 합정을 지나 당산으로 간다

철교를 건너는 동안 일 분간의 한강 풍경

안내 방송의 당산이 내겐 당신으로만 들린다

 

당산엔 당신이 살고 있었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가녀린 파문이 여울지고

슬픈 것들의 유속이 내게로 쏠린다

 

사랑한다는 말이 사랑했었다는 말이 되어 강물을 건너던 날

한결같이 흐름을 바꾸지 않는 물결은

중얼중얼 연착의 이유를 갖게 되었지

끝끝내 나에게 도착하지 않던 당신

순환선처럼 떠돌기만 했지

 

넘치는 질문으로 강물은 수런거렸고

둥근 뺨을 지나 흘러간 눈물은 물고기 밥이 되었을까

아직도 슬픔을 산란하고 있을까

 

이곳을 지날 때면 허물어지는 시간

물풀처럼 흔들리며 수심을 읽는 일이 늘어났어

 

우리는 서로가 못 본 사람

서로가 모르는 사람

그러나 어디선가 본듯한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건지

 

때로는 지상보다 지하가 더 편할 때가 있어

강물이 뒤척이는지 찰랑이는지 안 봐도 되니까

 

일 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어둠에서 번져오는 아무렇지도 않은 아득

나는 그 속에서 매번 나를 놓치고 만다

―『합정에는 우물이 없고 당산에는 당신이 없다, 더푸른출판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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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황남하

 

꽃기린이 가시를 세우고 죽었어요

희망은 분질러져 삭정이로 나뒹굴고

마른 이파리들이 물을 거부하네요

종이 상자 안을 견디던

정수리까지 범람하는 비명

툭툭 잘려나간 모진 음악들

 

좋았던 일은 왜 어제가 될까요

방치는 왜 이전과 이후를 다르게 만드는 걸까요

 

메마른 가지 속 가시가 날카롭게 내 눈동자를 찌르네요

빨갛게 핀 꽃잎들은 여름의 태양과 황홀을 나누었었죠

 

앙증맞은 가시는 매력의 총량이었어요

때가 지난 것도 아닌데 계절이 바뀐 것도 아닌데

 

여름내 지칠 줄 모르던 꽃기린

 

싱싱한 햇볕들을 듬뿍 쐬어줘 봅니다만

이것은 제 목을 제가 비틀어대는 반항일까요

드디어 단단하게 병이 피어납니다

 

한 아름의 신음을 전지하고 싶습니다

 

저 말라버린 화초가 다시, 꽃을 피운다 해도*

웃음은 빈약해지고 감정은 허약해질 겁니다

 

*나희덕의 <다시, 다시는>

 

―『합정에는 우물이 없고 당산에는 당신이 없다, 더푸른출판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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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새로운 정원이 된다

 

황남하

 

몇 겹인지 모를 패랭이 꽃잎이

그대의 숨을 덮고 피어있다

 

꽃대 끝에서 말라가는 병동의 기록들

펼쳐졌다 접혀졌다 반복하기를 몇 해인지

화분도 꽃삽도 없이

울긋불긋 너머의 시간을 피워 놓았다

 

물 대신 술 한 잔을 부어놓고

선명한 꽃송이를 한 번 더 매만진다

 

목울대에서 빠져나온 마지막 말이

씨앗을 틔우고

우리들은 잠시 정물처럼 묵묵하다가

왁자지껄 다시 씨를 뿌린다

 

슬하엔 새로운 정원이 탄생하고

산책자들이 지나가고

먼 길에 기댄 꽃들의 누추한 한뎃잠이

이웃이 된다

 

살아가며 안부가 궁금해질 때

그대의 기척을 뒤적여보며

계절의 이마를 어루만져 본다

 

가난도 울음도 탄식도 없는

그대의 정원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둥글게 노을빛 산봉우리가 걸려있는 정원으로

패랭이꽃 젖은 한숨이 번지고

새들이 가끔 전언을 떨구고 날아간다

―『합정에는 우물이 없고 당산에는 당신이 없다, 더푸른출판사,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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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핍과 고통을 섬세한 시적 언어로 끌어안는 치유의 미학 - 미디어 시in

하린 기자 2016년 《문학나무》 신인상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남하 시인이 첫 번째 시집 『합정에는 우물이 없고 당산에는 당신이 없다』를 더푸른시인선 005번으로 발간했다. 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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