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페이지
박희정
나의 첫새벽은 오래된 목마름이다
씨실처럼 풀려나는 기억의 실마리가
뭉툭한 심지를 뚫고 느릿느릿 올라오듯
비밀스런 시간이 햇살을 만나기 전
여백의 숨소리는 백지로 걸어 나와
딱 한 줄 미지의 언어로 소곤대고 있었다
생각이 보이는 곳에 나는 줄곧 자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마법의 이정표 같은
스쳐갈 세상의 오늘, 그 첫 장 쓰고 있다
―박희정, 『말랑말랑한 그늘』, 현대시학,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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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세상은 침묵 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창밖 서늘한 공기 사이로 어스름한 기운이 감돌고, 그 틈새로 묵혀 둔 생각들이 슬며시 떠오른다. 텅 빈 순백의 바탕 앞에서 마음은 누구보다 먼저 깨어난다. 아직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과 밤의 꿈처럼 아련한 회상의 잔상은 여백을 유영한다. 박희정 시인의 시 「모닝페이지」는 새벽이라는 시간의 질감을 포착한다. 잊어버린 내면의 파편들이 되살아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몽환적인 순간을 그린다. 시적 주체는 “첫새벽”을 “오래된 목마름”이라는 역설적인 은유로 제시하며, 내면 깊숙이 자리한 근원적인 갈망이 고요한 아침의 침묵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기를 바란다. 기억은 “씨실처럼 풀려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며, 지나온 경험들이 현재와 은밀하게 연결되어 그 실체를 드러낸다. “뭉툭한 심지를 뚫고 느릿느릿 올라오듯” 떠오르는 서사는 의식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그려진다.
햇살이 스미기 전의 “비밀스런 시간”은 이름 없는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 그 시간 속 “여백의 숨소리는 백지로 걸어 나와// 딱 한 줄 미지의 언어로 소곤”댄다. 이는 새벽의 침묵 속에서 움트는 희미한 영감이나 직관,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탄생의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이 짧은 속삭임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시적 주체는 고요한 사유를 통해 내면의 성장을 경험한다. 외부의 소음으로부터 차단된 공간에서 “나는 줄곧 자라”며 자아를 확장해 나간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마법의 이정표 같은// 스쳐갈 세상의 오늘”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특별한 순간으로 재현된다. 시적 주체는 “그 첫 장”을 능동적으로 써 내려가며 앞날을 향한 의지를 표명한다.
실제로 ‘모닝페이지’는 의식이 막 깨어나기 전,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 자유롭게 글을 쓰는 창작 훈련 기법이다. 시인은 이 과정을 시의 언어로 풀어내며, 창작의 본질적인 순간에 다가선다. 새벽의 빈자리를 채우던 어슴푸레한 속삭임은 마침내 창틈을 통해 햇살의 금빛 물결 속으로 녹아든다. 낡은 목마름을 적시고 피어난 추억의 씨앗은 오늘이라는 첫 번째 페이지 위에서 푸르게 움트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유심상을 수상했다.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30 _ 박희정의 「모닝페이지」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30 _ 박희정의 「모닝페이지」 - 미디어 시in
모닝페이지 박희정 나의 첫새벽은 오래된 목마름이다 씨실처럼 풀려나는 기억의 실마리가 뭉툭한 심지를 뚫고 느릿느릿 올라오듯 비밀스런 시간이 햇살을 만나기 전 여백의 숨소리는 백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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