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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람 시인의 〈시조시각〉29 _ 이나영의 「유속의 허기」

시조포커스

by 미디어시인 2025. 5. 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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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속의 허기

이나영

가슴을 열어보니 소금이 가득 찼다

아무도 숨 가쁘게 살라 한 적 없었는데

불행이 몰려올까 봐
한없이 헤엄쳤다

오늘을 베어 물면 내일이 차올랐다

평면의 아침들이 밀어내는 물결 속에

잘하고 싶던 마음들이
자진하며 흩어진다

너절한 아가미로 말랑한 꿈을 꾼다

꼬리를 흔들수록 영롱해진 물음들을

더 깊고 캄캄한 곳에
은밀하게 묻어두려고
―이나영, 『나의 파수꾼에게』, 시인동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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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사회를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 명명하며, 우리가 더 이상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변화하는 유동적인 존재라고 진단한다. 삶의 형태가 해체된 이 시대에 우리는 점점 더 불안정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간다.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에서 때때로 자신을 놓치거나 잃어버리기도 한다. 이나영 시인의 시 「유속의 허기」는 이러한 흐름에 맞서거나 적응하며 살아가는 자아의 고요한 고백을 담고 있다. 멈출 수 없는 삶의 본질, 차오르는 불안, 내면의 목소리까지 시적 주체는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응시한다. 중심 메타포인 ‘물’을 통해 자아가 어떻게 자신의 결을 찾아가고 때로는 감추는지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가슴을 열어보니 소금이 가득 찼다”라는 강렬한 이미지는 고통과 상실의 경험을 환기한다. “소금”은 눈물이나 바다를 떠올리게 하며, 시적 주체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와 슬픔을 상징한다. 이어지는 “아무도 숨 가쁘게 살라 한 적 없었는데// 불행이 몰려올까 봐/ 한없이 헤엄쳤다”라는 구절에서 물의 이미지는 더욱 구체화된다. 주체는 마치 거대한 물결 속에서 한없이 발버둥 치는 존재처럼 묘사된다. ‘헤엄치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예측할 수 없는 시도를 의미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압박은 주체를 쉼 없이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오늘을 베어 물면 내일이 차올랐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은 현재에 머무를 수 없는 현대인의 숙명을 포착한다. 
  미래에 대한 압박은 순간의 만족감을 앗아가고, 그 자리에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남긴다. “평면의 아침들이 밀어내는 물결 속에// 잘하고 싶던 마음들이/ 자진하며 흩어진다”라는 구절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드러낸다. 일상에서 애써 붙잡으려 했던 소망들은 결국 힘없이 부서져 흩날린다. “물결”은 이러한 무력감을 심화시키는 배경이자,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사회적 동향을 반영한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주체는 희미한 불씨를 품고 있다. “너절한 아가미”는 현실의 고통에 의해 훼손된 내면을 드러내지만, “말랑한 꿈”을 꾸는 행위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끈질긴 생의 의지를 보여준다.
  시적 주체는 지속적으로 자기 성찰을 시도하면서도, 질문을 회피하려는 내면의 갈등을 안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꼬리를 흔”드는 행위로 표출되며, 변화하는 자아의 불확실함으로 연결된다. 그 과정에서 떠오른 “영롱해진 물음들”은 존재의 이유와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사유로 이어지지만, 주체는 이 “물음”을 “더 깊고 캄캄한 곳”에 묻어둠으로써 현실로부터 잠시 도피하려 한다. 요동치는 물결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의 외침은 젖은 모래알처럼 눅진한 침묵 속으로 스며들어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 연구서 『현대시조와 리듬』이 있다.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유심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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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속의 허기 이나영 가슴을 열어보니 소금이 가득 찼다 아무도 숨 가쁘게 살라 한 적 없었는데 불행이 몰려올까 봐한없이 헤엄쳤다 오늘을 베어 물면 내일이 차올랐다 평면의 아침들이 밀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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