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지워드립니다
―디지털 장의사
김나비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인터넷 바다
은밀함이 출렁이는 가상공간에 밤이 들면
하나둘, 어화를 켜고 누리꾼이 몰려들죠
포인트가 정해지고 의자를 당겨 앉아요
삭제할 정보를 꿰고 추를 멀리 던지면
커서가 빛의 속도로 사이트를 찾아가죠
시간을 감았다 풀며 웹서핑을 하다 보면
싱싱하게 복제된 루머가 손맛을 당겨요
떠도는 악성 댓글은 미늘처럼 상처를 내죠
비릿한 동영상이 유통될까 염려 마세요
촘촘히 삭제하고 잊힐 권리 찾아요
제로의 디지털 기록, 온라인 족적 염殮해드려요
― 『타임슬립』, 책만드는집,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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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지워드립니다’라는 디지털 장의사의 제안은 여러 사람들에게 솔깃함을 자아낸다. 인터넷상에 무분별하게 떠도는 ‘나’와 관련된 신원정보(영상물, 사진, 게시글)를 삭제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이른바, ‘잊힐 권리’ 때문이다. ‘나’의 동의 없이 올라간 자료들로 인해 개인적인 명예가 실추되고 악용 혹은 도용되는 사례를 막기 위해서 잊힐 권리에 관한 법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인의 부정부패나 의료사고, 고위공직자나 공인들의 범죄행위에 관한 정보 등 정작 국민이 ‘알 권리’가 있는 내용임에도 개인의 사생활 보호와 명예 회복을 위해 과거의 흑역사를 삭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도 있다. 여기에는 공직자의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가 필요하므로 공적인 일을 해 나가는 이들에 대한 정보는 공개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크게 작용한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인터넷 바다”에는 따뜻한 시선도 있지만 차가운 시선도 존재한다. “은밀함이 출렁이는 가상공간에” “하나둘, 어화를 켜고 누리꾼이 몰려”든다. 이는 어화漁火라는 이슈Issue에 물고기 떼(누리꾼)가 몰려들며 삽시간에 정보가 왜곡‧변질되어 퍼져 나가는 상황을 그린다.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은 시‧공간의 제약이 없어 마음만 먹으면 먹잇감을 금방 찾아 낚을 수가 있다. 디지털 장의사가 의뢰인에 대한 “삭제할 정보를 꿰고 추를 멀리 던지면”, “커서가 빛의 속도로 사이트를 찾아”간다. 그러나 인터넷에 올라간 정보를 완벽하게 삭제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인터넷상에 존재하는 공연성公然性으로 인해 온전한 삭제가 불가능하다. “시간을 감았다 풀며 웹서핑을 하다 보면”, “싱싱하게 복제된 루머가 손맛을 당”기고, “떠도는 악성 댓글은 미늘처럼 상처를” 낸다. 사실을 적시해도 문제가 될 수 있는데, 거짓 뉴스를 퍼뜨려 상대방의 명예를 더럽히고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안긴다면 잊힐 권리를 넘어서는 법적 처벌을 가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퍼진 거짓 뉴스나 정보를 한참 후에 삭제하며 수습한다면, 피해 당사자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미 거짓 뉴스와 정보에 노출된 당사자는 치명적인 상처와 고통을 겪었는데, 그 후 진실을 밝히고 알린다고 한들 당사자의 상처와 고통이 제대로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디지털 장의사는 “비릿한 동영상이 유통될까 염려” 말라며, “촘촘히 삭제하고 잊힐 권리 찾”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제로의 디지털 기록, 온라인 족적 염殮해드”린다는 단언이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이버 공간의 윤리인 네티켓을 잘 지키는 것이다. 비단 사이버 공간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찾고 자신의 정보를 보호받고 싶다면, 상대의 정보 또한 지켜줘야 한다.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상대를 대접해야 한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권리를 지켜내는 일이며, 자신이 떳떳해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송희)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대명사들』,내 말을 밀고 가면 너의 말이 따라오고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오늘의시조문학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29 _ 김나비의 「당신을 지워드립니다」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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