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곰팡이
박몽구
눈 내리는 새해 첫날
황포돛배 떠 있던 마포 강변 동네에 있는
출판연구소 삐걱거리는 문울 열자마자
와락 달려와 안기는 곰팡이 냄새
1948년, 정부 수립되던 해에 나온 출판대감
나랑 함께 나이를 먹어가느라
책들 사이에 눌려 어깨 바스러진
1957년도 판 출판 연감, 일제하 금서 36권...
아픈 우리 현대사를 건너온 책들이
상처를 견뎌온 시간만큼
훅 누룩곰팡이 냄새를 끼친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풀썩 책 먼지가 일어나는
1948년판 출판대감 속에는
월북 전 임화가 편집한 해방시선이며
북으로 넘어간 정지용 시집 목록들이
오래 외면당해 온 끝에
깊은 상처를 감춘 채 숨어 있다
끝내 창씨개명을 거부한 채
일본어만이 통용되는 강의실을 떠나
벽돌공장 노동자로 숨어 살아온 시인
새는 한쪽 날개 아닌
두 날개로만 날 수 있다고 말해준다
역사의 이슬로 사라진 저자들
남의 모진 손으로 그어진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
곰팡이 냄새를 빌려 말한다
공기청정기로 걷어내려 해도
창문 활짝 열어젖혀도
사위를 막은 아파트 벽에 가려
가시지 않는 책 곰팡이 냄새
역사의 아픔은 서로 씻겨주며
함께 갈 때
깨끗한 새벽을 열 수 있다고
상처를 먹고 자라는 책 곰팡이
한 뼘 더 자리를 넓힌다.
―『한밤중 단거리 선수』, 시와문화, 2025.
시를 위한 편식으로 오늘은 박몽구 시인의 시집 『한밤중 단거리 선수』를 읽는다. 시집에서 「책 곰팡이」에 특별히 주목한다. 오래된 책은 특유의 냄새를 품는다. 그 냄새는 곰팡이가 슬어버린 것으로, 시인은 그 냄새에서 지나온 시간의 상처를 생각한다.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수많은 현대사의 질곡을 거치면서도 남아있는 책이다. 여러 책은 금서로 정해져 오래 햇빛을 보지 못한 책의 목록을 알려준다. 책의 누룩곰팡이 냄새는 지난한 세월 속에서 외면당한 시인과 시의 목록들이 숨어서 자라고 있는 형상을 그리고 있다.
책 곰팡이를 깊이 의식하면서 역사와 시인이 함께 갈 수 있는지 시인은 묻는다. ‘새는 한쪽 날개 아닌/두 날개로만 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역사 속에서 진실을 찾던 시인은 날지 못해 숨어 살았다고 증언하기도 한다. 역사의 이슬로 사라진 저자들, 그들은 지금도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곰팡이 냄새를 빌려 그간 전하지 못한 말을 책 곰팡이로 풀어 놓는다. 불필요해 보이는 미세한 곰팡이를 통해서라도 할 말을 전하는 절박한 모습이다.
책 곰팡이의 역한 냄새 때문에 시인은 공기청정기로 걷어내려 하고, 창을 활짝 열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사방이 도시화된 아파트 벽에 갇혀 책 곰팡이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이에 오히려 역사의 아픔은 함께 갈 때 ‘깨끗한 새벽을 열 수 있다고/상처를 먹고 자라는 책 곰팡이/한 뼘 더 자리를 넓힌다’고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박몽구 시인이 발견한 책 곰팡이 냄새는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과 작가와 지성인의 면모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의미와 가치를 지킨다는 것은 어쩌면 외면당하는 세월을 견뎌야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때로는 진실보다 더 진실 같은 거짓이 판치는 세상을 지나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은밀한 책 곰팡이 냄새는 오히려 오랜 세월을 버티고 견디며 자신만의 고유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은 현대문명으로도 제거할 수 없는 진실이라 하겠다. 그렇게 책 곰팡이는 지난한 세월을 증언하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뼘 더 자리를 넓’혀 가는 중이다.

김신영
1994년 계간 《동서문학》 신인상에 당선하였으며, 시인, 평론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중앙대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홍익대 대전대 호서대 등 외래교수를 역임하였다. 시집 『화려한 망사버섯의 정원』(문학과지성사, 1996), 『불혹의 묵시록』(천년의 시작, 2007), 『맨발의 99만보』(시산맥, 2017), 『마술상점』(여우난골, 2021)과 평론집 『현대시 그 오래된 미래』(한국학술정보, 2007), 시 창작 이론서 『아직도 시를 배우지 못하였느냐』(행복에너지, 2020) 등을 발간했다. 2020년 한국연구재단 연구지원 사업, 경기문화재단 2019 우수작가/ 2016 출간지원 작가 사업에 선정되었으며, 2023년 심산재단 시문학상과 기독여성신문 주관 2024년 여성지도자상을 수상했다.
현재, 이천문인협회 회장, 《기독교문학가협회》 주간, 중앙대문인회 사무처장을 맡고 있으며, 이천문화재단, 돌봄센터 등에서 시 창작을 강의하고 있다.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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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영 시인의 시를 위한 편식3 _ 박몽구의 「한밤중 단거리 선수」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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