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린 기자
박태건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고려인 만두』가 걷는사람시인선으로 출간됐다. 이번 시집은 첫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한다』 이후 5년 만에 발간한 시집인데, 오랜 시간 축적된 삶과 기억, 그리고 가장 낮은 곳을 향한 시인의 시선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고려인 만두』는 개인의 체험을 넘어, 이름 없이 살아온 사람들, 역사 속에서 밀려난 존재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불러낸다. 시인은 군산과 익산, 전주와 광주, 유적지와 폐사지, 고려인 마을을 오가며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넘나든다. 그 여정에서 시는 유목민처럼 경계를 걷고, 물방울처럼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든다.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이야기하는 시’이다. 그의 시에는 밥상과 시장, 성당과 강, 산길과 마을이 등장하고, 그곳에는 늘 사람이 있다. 생선을 파는 어머니, 노동하는 아버지, 먼 나라에서 돌아온 삼촌, 시험을 앞둔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까지. 시인은 이들의 말 없는 삶을 대신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과하지 않되 부족하지 않은 어조, 오래 숙성된 음식처럼 간이 맞은 문장은 독자에게 ‘맛이 나는 시’로 이야기한다.
『고려인 만두』는 또한 기도와 기다림의 시집이기도 하다. 시인은 신 앞에서, 역사 앞에서, 그리고 삶의 고통 앞에서 함부로 단정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여 준다. 오히려 모른다는 사실을 끌어안으며, 슬픔 많은 사람들이 어둠 위에 세웠을, 빛을 더 오래 바라보는 시선을 지향한다. 그에게 흔들림은 절망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이며, 시는 그 흔들림을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윤리이자 위로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나바위 성당 팔각 창문 아래서」)이라는 시인의 문장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정조다. 『고려인 만두』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삶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건네는 연대를 향한 조용한 손짓이다. 봄날에 슬픈 사랑 노래를 부르듯, 이 시집은 아프고 외로운 존재들에게 오래 남을 온기를 건넨다.
나아가 이 시집은 사라져 가는 기억과 이름들을 다시 불러 세우며, 시가 여전히 우리 삶을 건너가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음을 조용히 증명한다. 박태건의 시는 독자를 설득하기보다 곁에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오늘의 세계를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돕는다.

<시집 속 시 맛보기>
남쪽
박태건
비 갠 아침엔
새가 와서
운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 귀를 앓아
아침부터 우는
새의 사정을 몰랐다
남쪽은 비
봄비 오는 나라
없는 사람의 말투를
생각하는 동안에
비는 내리고
새는 울고
젖은 가지 끝에
제 이름을 떨구어
흘러 가는 곳을 생각하며
―『고려인 만두』, 걷는사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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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테 속에는 박새가 산다
박태건
저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금강 하구언에 내려앉은 고니가
겨울 강에 발을 담그어
수온을 0.01℃라도 올리려는 안간힘을
식어 가는 강에 부리와 이마를 담그는
가청 오리의 오체투지를 어떻게 갚아야 하나
겨울 하늘을 나는 새 떼들
얼음장처럼 깨진
하늘을 기우는 저 바느질삯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긴 부리에 실을 꿰어
시침질하는 고니의 흐려진 눈을
기우고 또 기워도 남은
남루 같은 깃털을 잇는
간절한 한기를, 어떻게 해야 하나
강은 철새가 떠나기 전에
몸을 뒤집어
제 속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장문의 서신을 물에 띄워 보내는 것이다
―『고려인 만두』, 걷는사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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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을 쌓는 이유
박태건
돌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돌의 유전자를 가졌다 돌을 닮아
돌처럼 산다
손에 손을 얹듯
돌 위에 마음을 얹는다
돌 위에 돌
돌 아래 돌
옛사람들은 마음에 드는 이를 만나면
문 앞에 돌을 놓는데
그건 내가 어렸을 적 들은 이야기
들판에 홀로 선 탑의 이야기
그때 우린 빛나는 돌,
태초의 바다를 항해하는
물 위에 뜬 돌배
서로의 중력에 몸을 덥히곤 했지
―『고려인 만두』, 걷는사람,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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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일기
박태건
김제 만경 하고도 광활에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은 오답구 용현 아재 새벽 댓바람부터 일어나 밤이슬 밟고 돌아와서도 만경댁이랑 왕골 대자리 짠다지요. 글쎄 둘이서 오쟁이 깔 시간이 없어 자식이 없나 보다고 오답구 사랑방에선 말도 많지요.
오답구 용현 아재 한도 많지요 덕산 양반 눈감을 때 쇠고깃국 한번 먹어 봤으면 했다고 술 한 모금 담배 한 대 안 먹고 안 피우고 안 쓰고 했다지요. 그래 송아지 한 마리 샀는데요. 용현 아재 자다가도 일어나 송아지 보러 갔다지요
송아지 궁둥이가 제법 실해지자 남들 농사 두 배는 지어야겠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안 쉬고 끌고 나갔지요. 소가 쉬는 날은 비 오는 날 즘생이 사람 부지런한 걸 못 따라가서 땅 갈다가도 몇 번씩이나 하늘 쳐다본다지요. 글쎄,
하루는 새벽부터 쇠죽 끓여다가 여물통에 부어주고 콩도 한 되 부어주며 사람에게 하듯 오늘은 힘들 거니께, 많이 먹으라 하니 이놈의 소가 꾀가 나서 대가리만 살래살래 젓고 안 먹더라나요 글쎄,
용현 아재 놀래서 어디가 아픈가 살펴봐도 콧김만 씩씩하니 괜찮더래요 그래 용현 아재 콩 몇 줌 키에 받쳐 이래저래 까부니까 이놈의 소가 빗소린 줄 알고 먹더라나요 그냥 먹는 것도 아니고 환장하게 퍼먹더라나요 글쎄,
용현 아재 다 먹는 거 보고 나서야 이랴, 이랴, 끌고 나오니 이놈의 소가 하늘 한번 쳐다보고선 그제야 속은 줄 알고 힐끔 째리더라나요 그래, 그 큰 눈이 가자미만큼 찢어지더라나요 글쎄,
―『고려인 만두』, 걷는사람, 2025.
이름 없이 살아온 사람들과 역사 속에서 밀려난 존재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 노래 < 신간+ < 뉴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이름 없이 살아온 사람들과 역사 속에서 밀려난 존재들을 향한 따뜻한 사랑 노래 -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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