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
염창권
길가에 서 있던 공중전화, 이제 없다
떼어낸 자리에는 파스를 붙인 듯이
회칠된 사각의 공란,
그런 기억 겹겹이
시차를 건너와서 내 몸에 기대일 때,
통신선을 따라갔던 아물지 못한 종적이
아프게 또 왔다가 간다,
점선으로 이은 곳에
눈발이 붐비고 있었는데, 그 불빛 밑
슬픔을 켜놓은 상자 안에서, 수화기가
매달려, 안 보이는 말을 공중에 쏟는다.
― 염창권, 『오후의 시차』, 책만드는집, 2022.
----------------------
아주 간혹, 길가에 선 공중전화 부스를 마주할 때가 있다. 아무도 찾지 않아 먼지 쌓인 공중전화지만 왜인지 반갑고 정겨운 마음이 든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울고 웃던 공중전화에 얽힌 에피소드를 펼치며 아날로그 감성을 소환하다 보면 소박한 기쁨과 낭만이 움튼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니 공중전화를 사용할 일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호출기에 남긴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할 때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공중전화 부스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앞사람이 긴 통화를 하고 있으면 얼굴을 찌푸리며 문을 두드렸던 기억이 있다. 반가운 전화 통화를 하다가 준비된 동전이 다 떨어지는 소리에 가슴 철렁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개인 휴대전화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공중전화의 수요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2000년대까지는 그나마 휴대전화가 없는 초등학생, 청소년, 군인, 외국인 등의 수요가 있었지만 점점 휴대전화 보급 연령이 하향화되고, 현역 군인 휴대전화 사용 허용, 로밍 서비스 발전 등으로 현재는 공중전화 수요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염창권 시인의 「공중전화」에서 이야기하듯 “길가에 서 있던 공중전화”는 이제 보기 드물다. 화자는 공중전화를 “떼어낸 자리”에서 “기억 겹겹이” 포개진 감정의 조각들을 더듬는다.
이 “사각의 공란” 속에 많은 이들의 추억을 채우는 응축된 “시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과거의 시간은 “아물지 못한 종적”의 “슬픔”을 향해 틈입한다. “수화기가// 매달려, 안 보이는 말을 공중에 쏟”아내는, “아프게 또 왔다가” 가는 “눈발” 서는 시간이 현재와 과거라는 두 겹의 시간층을 형성한다. 그것은 마치 “점선”의 목소리를 불러 세우며 사라진 풍경을 기억하는 그리움의 정조를 되새김질하는 듯하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이 있음.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 선정, 2019년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7 _ 김영주의 「가로등도 졸고 있는」 (0) | 2023.02.05 |
---|---|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7 _ 정수자의 「통로에서 통로 찾기」 (0) | 2023.01.24 |
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6 _ 강현덕의 「시간이 묻혀 있는 해변」 (0) | 2023.01.04 |
김보람 시인의〈시조시각〉5 _ 이우걸의 「연하장」 (0) | 2022.12.26 |
표문순 시인의 〈단시조 산책〉6 _ 박성민의 「당신이라는 접속사」 (0) | 2022.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