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로에서* 통로 찾기
정수자
통로가 곧 미로 같은 초대형 꿈의 마트
일용할 욕망으로 치솟는 칸칸마다
오늘의 전시를 향해 전열을 가다듬는다
동(東)에서 서(西)로 동서분주 통독을 여며가는
냉동과 적정온도 도나우의 왈츠에도
오로지 속바람일랑은 통로들의 계약 연장
기한 지난 소시지를 몰래 모여 뜯던 밤은
때마침 크리스마스, 욱여넣고 헤졌지만
바깥도 또 다른 통로라 눈보라만 눈부셨다
트럭 몰다 지게차도 겨우 모는 동독 통로
물품 묶는 노끈으로 제 목을 묶고서야
비로소 빠져 나갔다, 가없는 생의 통로를
* 동독 출신 토머스 스터버 감독의 영화 〈인 디 아일 In The Aisles〉
― 정수자, 『파도의 일과』. 걷는사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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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마감 시간의 초대형 꿈의 마트, 그 비좁은 통로로 독자를 데려간다. 빛도 잘 들지 않는 대형마트 통로를 오가며 직원들은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동(東)에서 서(西)”를 향해 반복적으로 움직인다. 무던한 미소 뒤에 가려진 외롭고 지친 그들의 일상은 유통 기한 지난 “소시지를 몰래 모여” 뜯으며, 동서분주하면서 생의 통로를 계약 연장해야 하는 과정으로 드러난다. 마트 직원의 일상을 담은 토머스 스비터 감독의 2018년 개봉작 〈인 디 아일 In The Aisles〉을 배경으로 한 이 시는 대형마트 야간 근무자들의 수고와 단조로운 삶을 칸칸이 채운다. 이들의 삶의 경로는 물건이 진열된 가로로 된 길과 위아래로 물건을 나르는 지게차를 중심축으로 펼쳐진다.
대형마트는 고립감과 고독감을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하는 공간이지만 이들에게 통로는 소통의 공간이기도 하다. 좁디좁은 생의 통로를 다니며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도 희망은 있을까? 시인은 유통 기한이 지난 음식을 모여서 먹던 반복적 일상에도 성탄은 온다는 것, 상처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과 웃음을 나누는 위로가 있다는 것을 슬쩍 끼워 넣는다. 그러나 “바깥도 또 다른 통로라 눈보라만” 휘몰아친다. 어두운 바깥, 마트를 나서는 순간 그들은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목메 자살을 한다. “트럭 몰다 지게차도 겨우 모는 동독 통로”를 지나 그는 비로소 생의 통로를 빠져나갔을 것이다.
통로는 인간 욕망의 진열장이다. 통로의 양옆에는 좌우로 인간의 욕망을 보여줄 수 있는 상품들이 진열돼 있다. 이 시는 인간의 삶이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형마트 통로를 반복적으로 돌고 도는, 부질없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의 통로를 벗어나려면 죽어야 한다는 이 현실이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참 덧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세상이 온전히 어둠에 잠기지 않는 건 작은 손을 건네는 불씨 같은 희망이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그 희망으로 생의 통로에서, 통로를 찾는다. (이송희 시인)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 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 좋은 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미디어 시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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