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묻혀 있는 해변
강현덕
모래성 쌓다가 시계 하나 주웠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쯤일까
깊이에 더듬거리는
더 높고 더 넓은 성
태엽만 붙어 있는 성주의 녹슨 광영
유리는 모래로 되돌아가 버렸고
바늘도 파도에 굴복해
일찌감치 떠났으리
긴 복도 비단 옷자락 날마다 펄럭이고
벽마다 반짝이는 것 밤낮 눈부셨을
그 성은 이젠 모래성
무너진 시간의 무덤
― 강현덕, 『너는 내가 찾는 사람이 아니어서』, 시인동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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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묻혀 있는 해변에서 주체는 모래성을 쌓다가 시계 하나를 줍는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쯤”일 것으로 추정되는 그곳.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소멸의 통로일 것이다. 유리는 모래로 되돌아가고, 바늘도 파도에 휩쓸려 떠나고 이제 남은 것은 “태엽만 붙어 있는 성주의 녹슨 광영” 뿐이다. 그러나 빛나는 영광은 이미 녹이 슬어 과거가 되었다. 한때는 성주로서 권세를 누렸으나 이제 그 성城은 시간의 무덤에 묻혔다. 그리고 부귀영화는 한순간에 수포水泡로 돌아간다. 모래성이라는 상징 자체가 부질없이 사라질 한순간의 영광 아닌가. 해변은 그 영광의 잔해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나 다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다. 여기는 시간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은 한순간의 꿈에 불과하다. 이 시는 지금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가 영원하거나 절대적이지 않으니, 그 자리에 너무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시간이라는 패러다임은 모든 이들에게 예외 없이 공평하게 적용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다. 기회를 잡았다 싶으면, 그 권위를 빌려 온갖 갑질과 횡포를 일삼는 이들을 적지 않게 마주한다. 정치계와 교육계, 연예계를 비롯한 각 조직의 부처에서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악행의 이력을 우리는 오래 기억한다.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화려했던 빛은 사라진다. 시간은 결코 영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게 무상無常하다. 시간은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어나는 모든 생명은 결국 죽는다는 것을, 지금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찰나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역경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을 다 흘려보낸 후에야 그 시간의 소중한 가치를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들도 있다.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생의 미학을 실천할 때, 우린 죽음을 넘어서는 영생을 살게 된다. 한순간에 파도에 휩쓸려 갈 수도 있는 모래성 같은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며, 인간이 쫓는 권세다. 권세보다 더 중요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는 권세를 인류애로 승화시킬 줄 안다. (이송희 시인)
이송희
2003《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열린시학』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시집『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이름의 고고학』,『이태리 면사무소』,『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평론집 및 연구서『아달린의 방』,『눈물로 읽는 사서함』,『길 위의 문장』,『경계의 시학』,『거울과 응시』,『현대시와 인지시학』,『유목의 서사』등이 있다.고산문학대상,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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