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
이우걸
“삼춘, 올해 허리병만은 꼭 낫길 기도합니다.”
곁에서 속삭이듯 한 조카딸의 연하엽서엔
무심히 스칠 수 없는 피붙이의 온기가 있다
‘축복’이니 ‘건필’이니 ‘화목’이니 ‘건안’이니
흔해빠진 관습 어투가 몇십 년째 들락거리는
그 틈에 이런 안부는 봄비처럼 새롭다
계절용 인사들이 역하다고 할 순 없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엔 어쩐지 짜증이 난다
생각도 성의도 없이 찍어낸 낱말 같아서
― 『시와문화』 2020년 봄호
예전에는 연말이면 지인들과 한 해의 감사와 새해의 덕담을 나누는 연하장을 주고받았다. 정성 들여 고른 카드에 손글씨로 꼭꼭 눌러쓴 풍성한 마음을 담은 연하장!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손쉬운 연하장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연하장의 대표 문구 ‘근하신년(謹賀新年)’을 새겨 새해의 “‘축복’이니 ‘건필’이니 ‘화목’이니 ‘건안’”을 비는 인사말을 불특정 다수에게 동시에 전송할 수 있다. 이는 SNS 메신저가 다양하게 진화한 결과다. 하지만 별다른 수고가 필요 없는 형식적인 인사는 “생각도 성의도 없이 찍어낸 낱말 같아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우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술이 늘 최선을 다하는 정성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소박한 진심에 감동을 받으며 닫힌 마음을 연다. 누군가는 손으로 쓴 편지를 건네며 싸운 친구와 화해를 하고 또 누군가는 짝사랑하던 대상에게 수줍은 편지로 고백을 했던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여기 이우걸 시인의 「연하장」이라는 시에서 우리는 따뜻한 나라의 “안부”를 만난다. “삼춘, 올해 허리병만은 꼭 낫길 기도합니다.”라는 “조카딸의 연하엽서”에는 정다운 마음이 담겨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 재활용되는 전자 연하장이 아닌 매서운 겨울 추위를 녹여주는 감성의 손글씨로 평소 상대방에게 전하지 못했던 진심과 사랑을 전해보면 어떨까? 쓰는 사람은 여전히 한 사람을 위로하고 다독여 주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이러한 아날로그 감성으로 서로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계절이 오기를 소망한다. (김보람 시인)
김보람
2008년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 시집 『모든 날의 이튿날』, 『괜히 그린 얼굴』이 있음.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유망작가 선정, 2019년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21세기시조동인으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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