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
류미야
상자 속 귤들이 저들끼리 상하는 동안
밖은 고요하고
평화롭고
무심하다
상처는
옆구리에서 나온다네, 어떤것도.
『눈먼 말의 해변』, 솔 시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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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필자는 ‘곁’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곁’이라는 말은 앞에 두어도 (곁눈, 곁불, 곁방, 곁말, 곁꾼 등), 뒤에 두어도 (도린곁, 낮곁, 밧곁, 봇곁, 웃곁 등) 매력이 넘친다. 단어 자체(발음)에서 풍기는 정겨움뿐만 아니라 어떤 것의 ‘옆’을 가리키는 의미로 인해서 공간적·심리적으로 가깝게 만드는 면이 있다. 오로지 내 쪽으로만 기운 ‘편’과 유사한 감정적 친근성이 있어서 이 단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갖게 한다.
이 시는 생활 속에서 자주 보게 되는 현상에서 포착된 깨달음을 다루고 있다. 보이지 않는 상자 속 ‘귤’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곁’이 어떠한 방식으로 상처를 가져오는지 순행적 구조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특별히 귤이 아니더라도 상자 속에 오래 담겨있는 무른 것들은 100% 온전하게 있는 경우가 드물다. 내 집에 오기까지 이동한 거리에서 서로 부비거나 부딪혀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가만히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상하게 되는 경우가 꽤 많다. 상자 “밖은 고요하고/평화롭고/무심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장에 흐르고 있는 시간은 밀봉되어 있기에 누구도 상자 안의 대상들이 상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 시는 이동하면서 흔들렸거나, 오래도록 한 곳에 머물렀던 상자 바깥의 시간보다는 가까이 있어서 “저들끼리” 평화롭고 고요하게 상처를 낸 상자 안의 시간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상처라는 것은 옆구리 즉, “곁”에서 나온다고 화자는 토로하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심리적 거리는 가깝게 두더라도 공간적으로는 사이를 띄우는 것이 오래도록 함께 갈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본의는 아니더라도 아주 평화롭게 곁에 있는 이들에게 상처를 준 일은 없는지 관심 있게 살펴보아야겠다. (표문순 시인)
표문순
2014년《시조시학》신인상 등단,시집『공복의 구성』,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열린시학상,나혜석문학상 등 수상,문학박사 졸업(한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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