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장례식
인은주
우리의 관계는 끝난 지 오래지만
너는 죽음으로 나를 호출했다
빈소에 너의 얼굴은 화환 속에 담겨 있다
너에게 들어야 할 어떤 말이 있었는데
이 생애 계산을 다 끝낸 사람처럼
어느새 너의 세계는 차갑고 고요했다
남긴 말이 없음을 그곳에서 알았다
후회와 혼돈은 내 몫으로 남겨둔 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른 채 또 헤어졌다
― 인은주, 『우리의 관계는 오래 되었지만』, 시인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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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필레머(Karl Pillemer)의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이라는 책에는 천 명이 넘는 70세 이상의 현자들이 말한 삶의 실천적 조언이 담겨 있다. 사회학자인 저자는 그들을 대상으로 자신들의 삶에서 유감스러웠던 점이나 후회스러웠던 점들을 인터뷰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조언과 지혜는 누군가를 원망하고 증오하며 사는 것은 참 부질없다는 것이다. 살아 온 동안 잘 베풀고 아낌없이 사랑하면서 살지 못했던 지난 세월을 후회했다. 우리는 보통 계산적으로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다.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지, 경제적 이득을 주는지, 나의 신상에 안락함을 줄 수 있는지를 따져가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려 한다.
인은주 시인의 시에는 오래전 관계가 끝난 상대의 부고를 받고 장례식에 가는 주체가 등장한다. “너에게 들어야 할 어떤 말이 있었는데” 그는 마치 “이 생애 계산을 다 끝낸 사람처럼” 차갑고 고요한 세상으로 떠났다. 떠난 그에게 기대했던 말은 아마도 아낌없이 널 사랑했다거나, 고마웠다거나 미안했다는 식의 말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너를 잊지 않고 있다거나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말이었을까? 살아생전 그와의 관계도 좋지 않게 끝났는데 부고 문자를 갑작스럽게 받은 주체는 당황스러운 듯하다. 그 둘 사이에는 무언가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 후회와 혼돈이 남는다고 했으니 살아있는 동안 헤어지고 나서도 미처 하지 못한 말과 행동이 있었고, 그 무언가를 기대했다는 의미가 되겠다.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후회와 혼돈이 없다.
사이 좋게 행복한 삶을 살다가도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경우도 있고, 원수처럼 미워하고 괴롭히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평생 함께 사는 경우도 있다. 서로에게 뭔가를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빚’이든 ‘풀고 가야 할 업보’든 우리는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그런데 증오하고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살아가면 풀지 못하는 마음의 빚만 갖게 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응어리진 마음은 서로를 위해 어떻게든 풀고 가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모른 채 또 헤어”지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서로를 더 아끼고 사랑해야겠다.(이송희 시인)
이송희
2003 《조선일보》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했으며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평론집 및 연구서 『아달린의 방』, 『눈물로 읽는 사서함』,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현대시와 인지시학』, 『유목의 서사』등이 있다. 고산문학대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전남대학교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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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 시인의 〈時詩각각〉4 _ 인은주의 「너의 장례식」 < 시조포커스 < 기사본문 - 미디어 시in (msi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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