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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이기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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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디어시인 2023. 3. 6.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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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단의 눈동자를 통과하는 긴 그늘의 아름다움

 

 

 

인터뷰 진행: 이미영 기자

 

 

2020년 제 39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이기리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문학과 지성사, 2022)를 발간했다.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를 낸 지 2년 만의 출간이다. 시인은 앞선 시집에서 내밀한 경험에서 출발한 시편들이 인상적이었으며 과거의 상처를 망설임 없이 드러내고 마주하는 용기가 돋보였고,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화자의 감정을 과장 없이, 담담하고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김수영문학상 최초로 등단하지 않은 신인작가로 본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관심을 받은 바 있다. 그런 그가 2년 만에 새로운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를 들고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시인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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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김수영문학상을 받고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하여 또 하나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시집 발간에 대한 간단한 소회와 함께 예전과 달라졌다고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A1: 우선 아주 후련합니다. 그동안 저는 삶에 최선을 다했고, 열심히 시를 썼고, 두 번째 시집으로 묶을 수 있었으니까요. 세상을 뒤집을 만한 혁명은 아니어도 누군가의 마음에는 작은 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 것. 늘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곤 합니다. 예전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어떤 미래를 직감하게 됩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쓰고자 하는 사람이구나.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니 오래 쓰는 시인이 되고 싶어졌어요. 정말 오래오래.

 

Q2: 첫 번째 시집은 모래 알갱이들이 사방에 퍼져 있가넷-탄생석으로 문을 열어서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나겠습니다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에 반해 이번 시집은 무엇이 그렇게 무섭고 두려워?”로 시작하는 여백 발화를 첫 번째 시로, “사라지는 책임과 폐기되는 약속그리고 몇 걸음도 못 가 자꾸만 풀려버리는 신발 끈이라는 구절이 있는 여백 화자를 마지막 부분에 놓으셨습니다. 시인님에게 여백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A2: 여백은 제가 살면서 자꾸 바라보게 되는 자리입니다. 저는 눈앞에 놓인 실체보다 그것이 사라진 이후 남겨진 빈자리를 더 오래 보는 경향이 있어요. 처음부터 공허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것도 없는데 사라짐이라는 현상이 발생할 수는 없지요. 사라지려면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백은 특별해요. 여백은 단독자의 상태로는 증명할 수 없죠. 여백에는 최소 둘 이상의 관계가 필요합니다. 나와 당신 사이에는 결코 하나로 포갤 수 없는 여백이 마련되지요. 내가 당신을, 그리고 당신이 나를 아는 순간부터 여백이 생기고, 실은 여백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이미 무언가가 사라진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여백도 사라지게 되고요. 우리는 관계 속에서 수많은 약속을 하고 책임을 갖습니다. 그것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관계는 믿음직스럽지만 그렇지 못한 관계들도 많이 보고 겪었습니다. 관계에 늘 최선을 다하기는 하지만 결국 다시 어떤 공허한 시간으로 돌아가야 하는 필연을 느낄 때, 저는 관계가 보여주는 여백을 자주 들여다보았습니다. 나와 당신이라는 실존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사라질 수조차 없는 그 미지의 시간을.

 

Q3: 시집 속에서 시인님은 화자와 상대방의 관계를 잠시 기댈 수 있는 호칭”(p.9)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시인님의 시적 세계관 속 관계란 어떤 것일까요?

 

A3: 이 질문을 보지 못하고 위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거의 다 대답한 것 같네요. 제가 생각하는 관계란 영원하지 못하고 지극히 제한적인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때로 어떤 관계가 영속하리라 믿으며 살아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계일 뿐, 실재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나더라도 서로를 기억하고 만나는 세상을 꿈꿉니다. 관계는 바로 관계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초월하고자 합니다. 잘 사라지기 위해서 평생 꼭 붙들고 싶은 것. 관계란 훗날 발생할 나의 사라짐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을 근거예요.

 

Q4: 시인님은 꿈이야말로 가장 벗겨지기 쉬운 피부”(p.65)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집 전반을 흐르는 꿈에 대한 시들이 눈에 띄는데요. 오지 말아요-꿈 속이기(p.45), 버금가는 날들-꿈 변명하기(p.75), 아주 그만두는 축소-꿈 흐지부지하기(p.141), 이제 다 지나갔다 남은 것은 단 하나-꿈 미련하기(p.147)같은, 기표를 미끄러지듯 써내려간 일련의 시들이 인상 깊습니다. 시인님에게 꿈은 어떤 의미이고 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으셨나요?

 

A4: 제가 꿈을 좀 자주 꾸는 편이에요. 그만큼 잘 못 자고 뒤척인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평소에 어떤 근심과 걱정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길래 다양한 꿈이 재생되는 걸까요. ‘꿈 연작시라고도 부를 법한 시들을 쓰고 싶었어요.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이 쓰는 꿈에 관한 시. 모두 실제로 꾼 꿈을 바탕으로 변형을 가미해서 쓴 시들입니다. 보통 꿈은 무의식을 발현한 모습이니 아주 쓸데없이 뒤죽박죽일 것 같지만 정말 꿈이 그러던가요. 꿈은 의외로 실존에 가깝고 맥락이 뚜렷해요. 어쩌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는 일들도 많이 일어나죠. 그러니 제가 쓴 꿈의 모습은 기표보다 기의와 친밀합니다. 또 다른 세계에서 의미가 되고자 하는 일들. 그러나 그 모습이 너무나도 무력해서 잠에서 깨어나면 금세 허물어지고 마는 것. 꿈은 너무 쉽게 부서지는 것 같아요. 정신이 깨어나는 것만으로도 말이죠. 정신은 꿈이 건설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없어요. 그냥 언어라는 가공물을 통해 재건한 꿈의 단면을 표현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뒤에 달린 부제는 꿈을 완벽하게 담아내는 일에 실패했음을 보이는 여러 행동입니다.

 

Q5. 현재 여행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시인의 여행은 특별할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덧붙여 향후 활동계획도 궁금합니다.

 

A5: 저는 지금 런던에 있어요. 런던에만 있을 것은 아니고 몇몇 나라와 도시를 가긴 할 건데요. 별다른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이랑 똑같이 유명한 곳도 다니고 있고 사진도 많이 찍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있어요. 그리고 노트를 펼쳐서 그날 제가 본 사소한 모든 것들을 다 적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만 보고 느낄 수 있는 생경한 감각들을 최대한 놓치지 않고 싶어서요. 물론 전부 다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놓친 것도 많을 거예요. 그래도 여행 중에 보고 있고 본 것들을 적는 시간만큼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기분을 느껴요. 향후 계획이라면, 우선 이 여행을 잘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죠. 그다음에는 다시 원래 살던 일상을 살아가며 시를 쓰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는 새로운 단행본도 있으니 기대 많이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Q6: 시집 중에서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시가 있다면 어떤 시일까요? 가장 마음에 드는 시이거나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낭송하고 싶은 시도 좋습니다.

 

A6: 제가 지금 낯선 땅에서 혼자여행하는 중인지라 나를 돌아볼 시간이 많으면서도 약간 헛헛함을 느끼고 있거든요. 소속이 사라진 기분이에요. 관련된 시까지는 아닌데 시집 1부가 끝날 즈음 히치하이커라는 시가 나옵니다. 손을 자주 드는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지금 혼자라는 기분에 휩싸여 있다면 함께 읽고 싶은 시입니다.

 

 

 

<시집 속 시 맛보기>

 

 

히치하이커

 

 

이기리

 

 

그때 내 뒤에서 솜뭉치가 날아왔다

솜뭉치는 앞에서 여러 솜들로 흩어졌다

 

가여워, 모여 있는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낸 목소리를 녹음했다

 

거리를 딛는 발은 차가웠다

언제나 너를 짓누르는 것은 배낭이나 중력이 아니었다

 

손을 맞잡으면 우리는

점등될 세계를 기다렸다

 

너는 너의 꿈에서 넘어진 나를 일으켰다

함께 가야할 곳이 있다고 했다

 

손을 들었다

계속 흔들었다

―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문학과지성사, 2022.

 

 

 

춘수春愁

 

 

이기리

 

 

낮잠을 자고 있어나 기지개를 켜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거울 속으로 들어가려는 내가 보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깍지를 끼고 두 팔을 높이 뻗었다.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개미가 바닥에 고인 햇볕을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뗀 자리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명을 의미하는 손금 위에 개미의 몸이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개미의 이목구비까진 보이지 않았지만. 개미의 얼굴을 눈으로 직접 본 적 없지만. 창밖으로부터 시작되는 봄을 보고 있었을 거다. 목련이 구더기처럼 피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벚꽃이 활짝 핀 나무가 종종 가지를 늘어뜨려 창을 두드리는 밤도 올 거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또 다시 기지개를 켜러 나오겠지. 거실은 아직 차가운 공기에 휩싸여 있고 거울 속은 깜깜하겠지. 들어가고 싶어서 깨버리고 싶은 계절도 있겠지. 꽃망울이 맺혀 있는 걸 보곤 누군가의 눈물을 모아 매달아둔 것 같다고 말한 사람에게도 봄이 왔을까. 봄이 오고 있었다. 밝아오는 곳을 향해 걷던 개미와 휴지통에 버려진 개미가 동시에 살아 있는 봄이. 신음 가득한 봄이. 몸이 찌뿌둥했다. 몸이 자꾸 풀리지가 않았다. 창틀에 쌓인 먼지나 닦아야겠다. 다 쓴 부탄가스와 염색약은 잠시 옆으로 치우고. 거울이 금이 난 명치를 부여잡고 내게 오고 있었다.

―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문학과지성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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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이기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발간 - 미디어 시in

인터뷰 진행: 이미영 기자 2020년 제 39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이기리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젖은 풍경은 잘 말리기』 (문학과 지성사, 2022)를 발간했다. 첫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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