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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자 시집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지혜 시인선으로 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3. 10.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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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서 피어나는 환한 문장

 

 

 

김분홍 기자

 

 

2016애지로 등단한 유계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이 지혜 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유계자 시인은 첫 시집으로 오래오래오래를 출간했으며 2013년 웅진문학상과 2018년 애지문학작품상을 수상했다. 또한 2019년 세종문화재단 창작지원금을 수혜했다.

 

유계자의 시는 바닥에서 새로이 피어나는 삶을 그리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고 바닥에서 새로운 삶이 피어나는 건 아니다. 바닥까지 찍고 올라오는 힘이 있어야 새로운 삶이 피어난다.”는 오홍진 비평가의 말대로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바닥에서 피어나는 환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서정에 바탕을 둔 유계자 시인의 시는 바닥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그렇다면 유계자 시인에게 바닥은 어떤 곳일까?

 

사다리가 높을수록 골짜기도 깊어/헛디딘 발이 미끄러지면 소문만 구조되고/바닥의 감정은 닿지 않는다”(뭐 특별할 것 있습니까) 이렇게 경사가 심한 생의 높이는 미끄러지기 쉽고/바닥은 수렁이어서 아무 데나 움켜쥐어야 했다고//제대로 불러본 적 없는 사랑은 널린 사랑을 잘도 찾아가는데”(마트료시카) “햇살 한번 뜨겁게 지나가자/우지끈 옆구리가 기울어지고 귀에 걸린 웃음도 지워진다/마지막 남은 콧대가 발등을 찍고//너는 물이니 물로 돌아가라/몸이 빠져나간 바닥이 흥건하다”(눈사람 에덴) 이런 시구들은 바닥 톺아보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렇듯 유계자 시인은 타인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보기 위해 기꺼이 바닥까지 내려가는 모험을 감행한 결과 사람들 저마다의 삶에 드리워진 여백을 꽃무늬 환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타자의 아픔에서 상련(相憐)을 느끼는 시 정신은 유계자 시인의 시를 가로지르는 힘이다.

 

 

 

 

시집 속 시 맛보기

 

 

연출자

 

 

유계자

 

 

어제는 청각이 마비된 오류투성이

서문을 지나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면

 

헤어진 적 없는 너에게 안녕을 보낸다

오래 지속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으므로

 

싱거운 다음 페이지를 기억하려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뉘엿뉘엿

하루가 저문다

 

어긋난 날들이 잠복을 하고

틸란드시아 긴 수염은 이승의 그늘진 무대 뒷면까지 자란다

 

주섬주섬 발을 빼고 소품을 챙겨 무대 밖으로 사라지는 난색에도

어린 숨소리까지 줄로 재는

뜨끔거리는 기침 하나 한 번의 눈웃음까지도

극으로 치닫고

그리운 것들은 모두 난독이 된다

다시 불이 꺼지고 그림자들이 멀어졌다

 

!

 

사람의 히스토리는 한 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각본은 오늘도 방문을 연다

 

 

-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지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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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료시카

 

 

유계자

 

 

둘러댄 슬픔 속에 또 다른 그녀가 있다

연대기를 내려가자 작은 여자는 흰 벽 사이에 눈물이 다 마른 표정을 줄이고

결혼은 엿 맛이었다며

속성으로 자란 결말이 쩍쩍 달라붙던 차가운 자작나무 숲의 말미에

파문이 적힌 문서를 자작자작 태웠다고 했다

 

경사가 심한 생의 높이는 미끄러지기 쉽고

바닥은 수렁이어서 아무 데나 움켜쥐어야 했다고

 

제대로 불러본 적 없는 사랑은 널린 사랑을 잘도 찾아가는데

 

구원의 줄 하나가 도장 찍는 일이라지만

독학으로 익힌 슬픔은 온몸을 적시고도 남았다고

강산이 몇 번 변해서야 자신을 겨우 찾았다며

툭 던져놓는다

 

인형속의인형속의인형속의인형속의인형속의인형ⵈⵈ

탁류처럼 번지던 울음이 빠져나가고

 

한줄기 소나기가 지나가는 동안 그녀의 몸이 닫히고 있었다

 

 

-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지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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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에덴

 

 

유계자

 

 

당분간 흰 세상

한 주먹 눈을 뭉쳐 돌돌 굴린다

순식간에 불어난 눈덩이

굴려놓은 두 개의 세상을 이어주고

 

빛나는 것만 보라고 단풍잎으로 눈을 붙여주고

나뭇가지로 한껏 콧대를 높였다

이왕 웃으며 살라고 웃음도 챙겨주고

사과를 싸던 분홍보자기로 옷을 입혔다

보기에도 좋아 아침저녁 안색을 살폈다

 

가끔 참새가 다녀가고

늙은 살구나무가 그늘을 늘여 어깨를 두드려도

못 들은 척

 

햇살 한번 뜨겁게 지나가자

우지끈 옆구리가 기울어지고 귀에 걸린 웃음도 지워진다

마지막 남은 콧대가 발등을 찍고

 

너는 물이니 물로 돌아가라

몸이 빠져나간 바닥이 흥건하다

 

널브러진 분홍보자기

탁탁 털어 빨랫줄에 올려놓자

만장처럼 펄럭인다

 

등 뒤에서 누군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지혜,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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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계자 시집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 지혜 시인선으로 출간 - 미디어 시in

김분홍 기자 2016년 『애지』로 등단한 유계자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도리를 풀지 않아도 저무는 저녁』이 지혜 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유계자 시인은 첫 시집으로 『오래오래오래』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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