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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시인 여섯 번째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 출간

신간+뉴스

by 미디어시인 2023. 3. 19.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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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존재들의 저항 의지와 직관적 성찰

 

 

하린 기자

 

 

2001년 계간<시현실>로 등단한 고경숙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이 시산맥 시혼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발표작 23편과 미발표작 28, 51편의 비교적 적은 작품들이 실려있는데, 시인은 그 이유를 제목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고양이집사처럼 봄을 상징하는 많은 오브제들은 봄바람처럼 가볍고 호흡이 짧은데, 독자들에게 꽉꽉 채워진 시집을 공부하듯 읽는 답답함까지 전가시키는 건 시집의 본질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4부로 나뉘어진 시편들은 많은 부분이 소외된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집 해설을 맡은 서안나 평론가는 고경숙 시인의 6번째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은 폭력에의 저항 의지가 기록된 보관소와도 같다. 다크 튜어리즘 여행처럼 불편한 진실이 시집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폭력의 시대로 규정한 것처럼, 일상화된 폭력은 우리에게 피부처럼 들러붙어 있다고 말했다. 또한 시집은 우리 일상에 내재한 폭력의 경험과 저항 의지와 제도권 밖으로 누수되는 소외된 자의 비극적 현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하며, 교묘하게 위장되고 은폐된 폭력의 정황을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는 지점이 이 시집의 시적 개성이라고 말했다.

 

시집에서 시인은 동서양의 과거와 현재를 횡단하며 공권력의 폭력 역사와 공동체의 비극적 체험을 추적하고 있다. 관조와 기억을 통해 추적하는 폭력의 역사와 개인의 트라우마는 곧 폭력에 저항하는 투쟁의 목록이기도 하다. 때문에 동서양을 관통하여 권력자/종속되는 자의 길항이 긴장감을 형성하는 시적 장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다루는 소재는 어둡고 쓸쓸하다. 폐광을 거닐다, 세상의 모든 세컨드는 우울하다, 신이 보고 있다, 골목에서 울다, 신데카메론에서처럼 절망의 끝자락에 선 사람들을 그렸지만, 궁극적으로 시인이 머무르고자 하는 시선은 희망쪽이어서, 굳이 슬프지 않다. 소재의 넓은 스펙트럼이 장황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진폭이 큰 시인의 세계관 속에서 섬세하게 노니는 언어의 현란함과 뜻밖의 서정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시집 속의 시 맛보기>

 

경계를 넘는 장미들

기숙사 효과*

 

고경숙

 

기숙사 장미꽃밭엔 무슨 일이 있나

 

5월의 햇살은 소녀들이 강의동으로 몰려나간 뒤 바람을 불러들인다

별을 담았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붉은 장미꽃잎들아 앞다퉈 창턱을 넘어라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성역, 소녀1이 쓰다 만 일기장 갈피를 지켜주기 위해 바람은 바르르 떨고 소녀2가 자고 일어난 침대시트에 붉은 꽃잎을 뿌린다 소녀3의 옷장에는 방금 전까지 소녀가 입어봤을 몇 벌의 원피스, 팔랑이는 쉬폰 소매와 치맛자락에 아직 소녀가 머문다

소녀4가 빠뜨리고 간 미학개론이 자는 척 돌아누워 있다

 

소녀들은 장미꽃 향기가 좋아 자주 창문을 열어 놓고

장미들은 소녀의 향기가 좋아 자주 벽을 넘는다

은밀한 내통은 이곳의 불문율이다

 

소녀들 몸에 장미가 필 때 기숙사는 사감도 눈이 먼다 소녀1의 통증과 소녀2의 우울과 소녀3의 불면과 소녀4의 식탐을 공유하고 하얀 침대에는 소녀들이 흘린 장미꽃잎들이 침착沈着된다

 

5월의 내음은 소녀들이 강의동에서 돌아올 때 절정에 달한다

소녀1과 소녀2와 소녀3, 그리고 소녀4가 장미를 불러들인다

기숙사 장미꽃밭엔 무슨 일이 있다

 

*기숙사 효과 : 월경동조

 

― 『고양이와 집사와 봄, 시산맥, 2023.

 

 

 

 

폐광을 거닐다

 

고경숙

 

반짝이는 것은 모두 각광을 받았다

 

빛나는 것들을 위해 주변은 어두워야 했고

시간은 볼모가 되었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삼족오의 후예는 권위의 상징으로

땅끝마을 갯벌을 뒤지던 초로의 아낙은 언약과 보은으로

이 빛나는 붙이를 지녔으리라

 

어둠을 채굴하면 빛이 되고 빛을 채굴하면 권력이 되는

종속의 관계

 

폐기의 수순을 밟는 순간부터 광산은 한낱 동굴이 된다

 

은밀하고 습한 곳은 쥔 자와 굴한 자가 알아서 구분돼

굴한 자는 그곳에서 저항의 죽창을 깎고

쥔 자는 은밀한 학살의 장소로 썼다

 

한 발짝 발을 내디딜 때마다 물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영광과 오욕을 지나오며 역사책 어느 구석에도 없는

잡초투성이 폐광 입구에

우연히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서늘하게도, 폐광은

사람의 한 생과 닮았다

 

반짝이는 꿈을 좇아 쉼 없는 노동을 했고

닳아빠진 육체 숭숭 뚫린 뼈의 길처럼

허리 펴지 못한 그곳에서

공습을 피해 굴댕이*가 태어나고 게서 자랐다

 

반짝이는 것은 누구의 영광이었단 말인가

물소리는 끊임없이 모스 부호처럼, 말한다

역사의 조력자로 억겁을 살아온 폐광은, 읊조린다

 

반짝이지 않아도 빛나는 것들이 있다

 

피난 중 굴속에서 낳은 아이

 

― 『고양이와 집사와 봄, 시산맥, 2023.

 

 

 

 

고양이와 집사와 봄

 

고경숙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고양이는 대답 대신 눈을 지그시 감고 꼬리를 흔듭니다

 

남자는 일어섰습니다 예식장에도 들어가 보고 초등학교 열린 교문으로 들어가 운동장을 거닐어보기도 했습니다 느티나무 가지에 파랗게 싹이 나오는 데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여자가 남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점심상 차려놓은 지가 언젠데 안 온다고 톤으로 약간 격앙됐습니다 미나리무침과 쭈꾸미숙회입니다 꽃무늬 앞치마를 펄럭이며 동네를 뛰어다닙니다

 

마을버스 정류장 앞에서 우체부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아저씨는 잘 만났다고 오토바이를 세우고 우편물을 건넵니다 시집입니다

 

우체부가 지나가고,

여자가 집에 들어가고,

남자가 대문을 괴어놓고,

그 틈으로 고양이가 들어갑니다

 

고양이는 마당을 사뿐히 건너 부엌으로 갑니다

부뚜막에 천천히 자리를 잡습니다

부엌문 너머 낮술 얼큰한 남자에게 고양이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봄입니까?

남자는 대답 대신 눈을 지그시 감고 발가락을 까딱댑니다

 

― 『고양이와 집사와 봄, 시산맥,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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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숙 시인 여섯 번째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 출간 - 미디어 시in

하종기 기자 2001년 계간로 등단한 고경숙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이 시산맥 시혼시인선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는 발표작 23편과 미발표작 28편, 총 51편의 비교적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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